비출산 결심 스토리 (1) by 에디터 E.ge
"젊다."
사진을 보던 아내가 탄식하듯 말했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2012년, 두 명의 젊은이가 즐겁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부셨다.
연애 시절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당시 30대 초중반이었지만 스스로 나이가 꽤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 속 우리는 피부가 덜 쳐져 보였고 약간 마른 모습도 좋게 느껴졌다. 그렇게 과거 사진을 보며 대화를 나누던 중,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저 사진 본 지 얼마나 됐지?”
“한 8년 정도 지났지, 아마.”
유산한 아이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할 말이 있지만, 어디서 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만큼 가슴에 깊이 묻어둔 일이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픔은 잠시 묻어 두고 아내에게 물었다.
나: 저 사진 되게 오랜만에 보는데, 어떤 감정이 들어?
아내: 잘 기억이 안나. 아마, 당시에는 저 사진을 자주 보았겠지? 하루에 한 번 이상 보지 않았을까? 그런데 벌써 그 사진이 낯설 정도로 오래 됐구나 싶어.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저 사진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것 같아. 그냥 초음파 사진이잖아. 굉장히 의학적 의미만 있었어. '아이가 잘 있구나' 하고 확인하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로 아니었지. 왜냐면 저 시기가 지나가면 당연히 아기가 나올 거니까. 그렇게 믿었으니까.
나: (충격) 나는 저 사진 보면서 아이에게 편지 써 주고 그랬는데. 아기가 생겼다는 기쁨이 생각보다 컸나봐. 아이를 무척 기다렸던 기억이 나.
아내: 임신 초기 계류 유산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란 걸 알지만, 그때는 내가 절대 유산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 당연히 순조롭게 출산하리라 믿었지. 남들처럼 신혼 1년 보내고, 아이가 생겼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정도로 가고 있구나 싶었어. 뱃속의 아이가 어떻게 되는 건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 나의 현실일 거라곤 상상도 안 했어.
비록 유산을 했지만, 우리에게는 '아이'가 있었다고 난 믿었다. 11주 만에 아이를 묻었다. 시신은 없지만, 어딘가에 우리 아이를 묻었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 온다. 정말 무엇보다 소중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미안한 내 아이. 세상은 비록 나에게 "없었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있었다"고 생각하는 아이.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 나에게 아내가 물었다.
아내: 내 뱃속에 11주 동안 분명 존재하던 아이인데, 세상 사람들 모두 아이가 없었다고 하겠지? 오빠는 어때?
나: 나는 아이 한 명을 잃은 느낌이야. 그래서 저 사진을 보면 너무 슬퍼.
아내: 그 애와 단 한 번도 교감하지 못했잖아. 그런데도?
나: 부모 마음에 한 번 품은 아기는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나에게는 '사람'이었던 아이가 세상에 명백히 존재했어. 사실 아이 심장 소리 딱 한 번 밖에 듣지 못했지만, 내가 안고 있던 아이가 죽은 느낌이 들어. 그래서 당시에 굉장히 힘들었어. 힘들다는 표현 외에 쓸 말이 없어. 정말 고통스러웠어. 유산 1주년이 당도했을 때, 아이를 추모하는 무언가를 하려고 했었어. 네가 너무 힘들어 할까 봐, 나만 추모하고 넘어갔거든.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아이였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 그러게. 이 이야기를 직접 나누는 일이 그동안 너무 없었구나 싶네. 그 당시에 바쁘게 지내서 감정을 잘 얘기하지 못하고 지나지 않았나 생각해.
나: 맞아. 그냥 서로 "괜찮냐?"고 확인만 하고 넘어간 느낌이야. 당시 이야기 꺼낸지 너무 오래 됐다.
우리는 이 일을 ‘평생 갈 아픔’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서로 배려해 지금까지 아이 잃은 슬픔을 묻어두고 있었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실제 우리는 유산한 시기를 잊고 잘 살아 왔다. 가끔 아홉 살인 1호 조카를 볼 때, 살았더라면 그 조카의 나이가 되었을 죽은 아이가 생각났다.(1호 조카와 같은 해에 임신을 했다.) 어쩌면 내가 1호 조카에게 극진한 사랑을 쏟는 이유가, 아이를 잃은 마음과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나눈 건 처음이었다. 산 사람의 상처는 아무는 법인가 보다. 아내는 방송국 일을 하느라, 아니 바쁘게 일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상황을 내가 물었다.
나: 아이를 다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아내: 당연히 했지. 처음에는 아이를 잃고 너무 슬펐어. 그래서 이 슬픔을 누르려면 새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 병원에서 6개월 후에 가지라고 했는데, 6개월이 너무 길게 느껴졌어. 빨리 다른 아이가 찾아와 슬픔을 거두어 가기를 바랐지. 그런데 그 당시에 일이 너무 바빴고, 기획 다큐멘터리 팀에 들어가면서 정신이 아예 없어졌어. 국장도 “올해는 이 작품 잘 만들어야 하니, 아이는 다음으로 미루는 편이 좋겠어”라고 할 정도였잖아. 그때는 나도 아이보다 중요한 무엇인가를 쫓는 마음이 크게 들었어.
나: 맞아. 그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아내: 응, 바쁘게 지내면서 유산한 사실을 잊은 느낌이었어.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점차 희미해질 정도로 바빴으니까. 그런데, 슬픔이 없어진 게 아니더라. 그냥, 감정을 계속 무언가로 눌러 놓은 기분이 들어. ‘넌 중요한 일을 해내야 해’라고 자꾸 압박하니, 나도 거기에 휘둘렸어. 임신 중에 썼던 일기를 지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볼 수도 없는 삶을 살았어. 죽은 아이에게 그게 정말 미안해.
아이를 품었다가 보낸 감정은 같을 텐데, 오빠는 조금 더 정성 들여 기억 또는 추모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런 과정 없이 일로 도망갔던 세월을 보냈어.
나라고 항상 아이만 생각하고 살았겠나.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저 아내보다 더 아이를 추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프리랜서였으니 그랬다. 당시에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더 기억할 수 있었다. 우리 ‘영영이’를 말이다. 우리 부부 이름에 있는 영과 영을 따서 붙인 태명이 ‘영영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