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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진 Dec 19. 2018

기저귀 가방

2018. 8. 14

10년 전쯤 구입한 천가방이 하나 있다(1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지만 세어보면 정말 10년이다). 구매한 경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당시 즐겨 입었던 스타일의 옷을 구입하던 인터넷 쇼핑몰로 추측한다. 어깨에 축 늘어지게 매는 천 가방이고, 뒤집어 앞 뒤로 입을 수 있는 양면 점퍼처럼 양면으로 다 맬 수 있다. 한쪽 면은 에메랄드보다 진한 녹색의 단색 천, 다른 한쪽은 남색에 가까운 파란색 바탕에 커다란 꽃무늬가 그려진 천이다.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스타일이라 저렴한 가격에 두 개의 가방을 메는 효과, 다시 말해 가성비가 좋은 가방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많이 낡았지만 컬러도 마음에 들고 개인적으로 천가방을 좋아해서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최근 다시 꺼내서 쓰고 있다. 용도는 기저귀 가방. 그러고 보니 한참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할 것도 없는 아주 짧은 순간.  


2008년. 대학원에 들어간 그 해였고, 세미나가 끝나고 같이 밥을 먹으러 나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문을 밀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옆에 있던 한 친구가 그 가방을 메고 있던 나에게 말했다. “이 가방 뭐야? 기저귀 가방이야?” 웃으며. 따라 웃으며 어깨에 걸쳐있던 가방 끈을 다시 잡았다. “아니야~”라는 대답을 했을까? 잘 모르겠다. 그 후의 기억은 없다. 정말 짧은 순간의 짧은 말.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데 5초도 안 걸렸을 그 말.  


그 짧은 말은 오래도록 어떤 감정을 남겼다. 반발감과 수치심. '이게 정말 기저귀 가방 같은가. 내가 보기엔 이쁜데. 너는 이런 가방 잘 안 메나 봐. 내 스타일이 애 딸린 아줌마 같은가? 아직 20대인데? 이게 뭐 어때서. 우 씨...’ 다행스럽게 수치심보다는 반발감이 더 컸을까, 그 말과 감정의 잔여물에 굴하지 않고 한동안 그 가방을 메고 다녔다.


10년 후, 친구의 말처럼 그 가방은 정말로 기저귀 가방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가방에 얽힌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이 묘한 기분은 무엇일까? 인정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시간이 흐른 후에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잘 보이지 않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보이기도 한다. 모든 게 그러진 않지만 그런 것들이 있는 것 같다. 나이 듦. 서로 다른 취향. 내가 아닌 또 다른 생을 돌보는 삶. 같은 것...  



파란 바탕에 커다란 꽃무늬가 프린트된 가방을 꽉 묶어 유모차 아래 장바구니에 밀어 넣으며 새롭게 피어난 묘한 감정을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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