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4.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사람과 일의 가치를 쓸모로 판단하지 말아 달라고 외쳤던 나의 소리들은 사실,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은 마치 투명한 거미줄 같다. 보이지 않아서 없는 줄 알았는데 내딛는 발과 뒤흔드는 몸통에 휘적대는 팔에 자꾸만 감겨오는.
아이를 낳는 일이 내키지 않았던 것도 아이를 낳게 되면 나의 쓸모를 잃을 것만 같아서였다. 강의를 하는 일. 돈가스를 튀기는 일. 그리고 육아. 아니 더 많다. 빨래, 청소, 편집 아르바이트, 고양이를 돌보는 일, 교회의 피아노 반주 등... 내가 선택했거나 나에게 맡겨졌거나 하는 많은 일들. 이 일들은 서열이 있다. 서열의 기준은 사회적 기능의 정도. 말하자면 고양이의 똥을 치우는 일처럼 소위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나 어떠한 경제적 대가도 없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육아는 사회적 기능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결과물이 당장에 보이는 일도 아니며 이윤을 남기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서열의 뒤쪽으로 자리하게 된다. 언젠가 뒤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난한 프로젝트(?)다. 축하의 박수는 부러움보다는 격려로 조금 더 기울어져있지 않을까? 순간 두려움이 훅하고 피어오른다. 끈끈한 거미줄이 피부에 아로새겨진다. 나는 언제까지 이 방에 갇혀 분유를 타고 있어야 할까? 나의 일들을 잃고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여 내 이름이 아닌 '00의 엄마'로 불리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쓸모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가? 아니면 일의 절대적 가치는 없다고 자위하며 기저귀를 가는 일도 신성하다는 마인트 컨트롤이 필요한가? 무엇이 옳은지, 아니 무엇을 선택할지, 아니 적당히 둘 다 잡아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사람의 가치를 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고상한 말이 우리 삶으로 비벼 섞이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울까? 엄마 vs 전문직 여성.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어떤 선택지가 환영받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