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 하시네요
2015년, 1년간의 병원 간호사 생활을 끝내고 꿈인지 탈출인지 알 수 없는 동기로 에티오피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월이라 한국은 한창 폭염에 시달릴 때였지만, 14시간이 걸려 도착한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예상 밖으로 꽤 추웠다. 고도가 3,000m에 달하는 고산지대이기도 하고 대우기의 한가운데인 것도 한몫 했다.
파견지는 수도에서 비행기로 1시간 떨어진 곳이라 한국 음식은커녕 중국 식당 하나 없는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늘 현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이 우리네 시골 장독대 안의 된장을 퍼먹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에티오피아 음식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강렬했고, 특히 그 시큼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가끔 생각나긴 하지만 굳이 다시 가서 먹을 만큼 그립지는 않으니, 호불호가 나뉘는 음식인 것만은 분명하다.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방문 간호를 하는 보건소에서 일한 덕분에 인심 좋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오전에만 네댓 번 씩 인제라*와 커피를 대접받곤 했다. 마음만 받겠다고 거절할 때면 “그런 건 없어, 마음을 받고 싶으면 먹는 것도 받아야지.” 하시며 내 ‘거절을 거절’ 했고, 내 위장은 번번이 주인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에티오피아의 주식으로 ‘테프’라는 곡물을 기르고 수확한 뒤에 발효시켜 만든 얇고 넓적한 빵.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있고 시큼한 맛이 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럭저럭 내 입맛에도 맞는 현지 음식이 있었다. 고기를 불로 구웠다는 뜻의 ‘샤크라 뜹스’였다. 숯불에 구운 소고기를 전통 화로에 올려 양파와 고추와 함께 내어주는 이 요리는 나를 포함한 육식주의자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았다. 종교적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에티오피아에서 유일하게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유치원생 수준의 서툰 현지어로 종일 현지 직원들과 일하고, 주민들을 만나고, 때로는 현지 사람들의 짓궂은 장난을 받아내느라 지치는 날이면, 내 모국어를 하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먹고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맨손으로 갓 구운 고기를 “아뜨뜨”하며 특유의 향신료가 들어간 소스에 찍어먹는 맛이란.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고기만 먹는 것이 아쉬웠던 우리들은 쌈장과 밥, 젓가락 등을 챙겨가 삼겹살집 회식 같은 분위기를 즐겼다. 아디스아바바보다 하늘이 맑은 어느 소도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야외에서 먹는, 물보다 싼 맥주 한잔과 뜨끈한 고기 한 점! 마음씨 좋은 식당 사장님도 이런 우리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진상’ 단골들의 행동을 너그러이 받아주었다.
다사다난했던 1년이 지나갈 무렵, 처음보단 현지 음식에 적응했지만 그 어떤 별미도 한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디스아바바의 한식당과 다른 한국인 단원들의 집에서 해먹는 한식이 감사하고 애틋하기만 했다. 요리에 흥미도 소질도 없었던 나는 현지어에 익숙한 선배 단원으로서 물건 구입이나 활동에 필요한 소소한 일들을 도와주고 한식을 얻어먹곤 했다. 일종의 품앗이였는데, 사람들은 복스럽게 먹는 내 모습에 요리한 보람이 있다며 기꺼이 맛있는 요리를 해주었다.
그즈음, 업무에서는 새롭게 부모 대상 영양교육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련 지식이 있는 영양 분야 단원이 필요했고, 때마침 기관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식품영양 전공자 단원이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타 지역에서 온 그 단원이 오자마자 나는 우리 지역의 버거 맛집에 데려갔고, 함께 ‘먹방’을 찍듯 신나게 먹었다. 전공이 영양이니 요리도 잘하리라는 기대에 부응하듯, 그는 현지 재료로 한식, 중식 가릴 것 없이 음식을 척척 해냈다. 매끼마다 모든 음식을 잘 먹어치우는 나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만날 때마다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가져오면 요리해주겠다 하여 나를 감동시켰다. 엄마가 해준 음식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때라, 이 남자 단원이 해준 음식에서 엄마의 손맛을 느껴지면 울컥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그중에서도 한 솥 가득 끓인 정성의 감자탕은 정말이지 우리 집 여사님의 그 맛 그대로였다. 건강을 추구하는 엄마의 철학이 반영된 듯, 짜지 않은 국 간에,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배추와 부추가 푹 담겨서 반나절을 펄펄 끓인 정성의 요리. 고향의 맛이었다.
정성 들여 오래 끓인 감자탕처럼 내 마음도 푹푹 익어갔던 걸까. 그때 나는 이 남자랑 결혼하면 어느 오지에 가서 살아도 고향의 맛을 느끼며 살 수 있겠구나 느꼈고, 그는 이 여자랑 같이 살면 평생 밥 해줄 맛 나겠다 싶었다고 한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손맛만 엄마 같은 게 아니라 잔소리도 엄마 같은 사람인 걸 말이다. 몸에 안 좋은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는 사람, 건강한 집밥을 해 먹이던 ‘엄마 손’의 사람. 그 남자는 현재 우리 집의 세대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남편은 바쁜 회사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한 집밥을 만들어 놓고 출근한다. 나 또한 여전히 ‘프로 먹방러’로서 그의 음식을 맛있게 비워낸다. 요리한 당사자가 만족하지 못하는 음식도 나는 소스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으니 요리할 맛이 나서 보람차다고 한다. 누가 누구에게 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로에게 참 다행이고 잘된 일이다.
음식을 별거 아닌 생계수단 정도로 여길 때가 있었다. 그저 끼니를 챙기면 되는 것, 에너지를 내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라는 새로운 환경은 내게 음식이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인제라만 먹던 삶이 아니었다면 집밥을 해주는 남자가 뭐 그리 대단했을까. 아마도 요리를 좀 잘하는 사람이네, 정도로 생각했겠지. 가끔 남편이 미워질 때면 인제라가 아니라 쌀이 주식인 나라였다면 좋았을 걸, 하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이내 소중한 한 사람을 알아보게 한 건 시큼텁텁한 에티오피아의 맛이었다고, 그건 어쩌면 신이 내게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글 신보혜, 간호사 출신으로 해외봉사, 연구원, 주부를 거쳐 ODA 사업관리자로 일하는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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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유연
편집 좋은 일 하시네요(인스타그램 @suchagood_j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