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소녀 Jan 09. 2022

제주도에 집을 사야겠다

코로나 난민의 제주표류

웃기는 소리지만 나는 제주도가 고향인, 제주도의 이방인이다. 서귀포에서 태어났고, 성인이 되고부터는 서울에 살았고, 상하이에 살다가, 지금은 제주에 산다. 정확하게는 제주시에 있는 가족 집에서의 더부살이. 내 집은 상하이에 있지만, 그 집이 있는 나라에서 외국인인 나를 받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제발 내 집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해 달라는 일곱 살 조카의 떼 같은 기도는 하지 않겠다. 정차든 표류든 항해든, 어쨌든 내 인생은 현재 제주에 있고, 자기 방을 2년째 빼앗긴 조카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진작 그랬다. 다들 내 처지를 고려해 말을 안 하고 있을 뿐.


그런데 한달살이 집을 알아봐야 할까, 일년살이 집을 알아봐야 할까, 아니면 장차 또 다른 팬데믹(세상 일은 이제 모르는 일이니) 혹은 자유롭게 한국에 들어와서 지낼 수 있도록 제주도에 집을 사놓아야 할까.

더 구체적인 전략도 필요하다. 제주도에 살면서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제주시 도심에 집을 구할까, 아님 육지의 사람들이 말하듯 (도심에 살 거면 제주도에 왜 살아) 감귤밭과 돌담 혹은 오션뷰가 펼쳐지는 시골에 땅을 사서 집을 지어야 할까.


알고 보니 '제주도에 집을 구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코시국 2년, 내 주변 수많은 지인들이 제주에 짧은 여행을 다녀가고, 제주에서 한달 살이를 한다. 그들은 늘 내게 묻는다. 제주에서 사는 것에 대하여. 나아가 제주에 집을 사는 것에 대하여. 내 대답은 늘 똑같았다. 제주의 여러 지역에서 사계절을 보내보지 않고는 그런 도박은 꿈도 꾸지 마라.



서귀포 출신인 나는 전국 최고 습도의 지역에서 살았다. 일주일에 비가 한두 번은 꼭 왔다. 아파트 1층에서는 늘 곰팡이가 생겼고, 제습기라는 신문물이 없던 시절에 물먹는 하마만이 배 터지게 일을 했다. 덕분에 나는 습도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으로 진화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늘 건조하고 메말랐지만, 상하이의 습도 높은 40도 더위 속에서는 태연하게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특히 서울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내리는 비나, 습도에 절어있는 날씨를 견디기 어렵다. 제주도에서도 제주시 사람들은 서귀포가 '습해서 못 산다'는 말을 늘 한다. 그러니 습도에 민감하거나 관절염이 있는 사람들은 제주의 남쪽 지역에 집을 사서는 안된다. (한달살이 정도면 패스)

하지만 '나는 죽어도 감귤밭이 있는 따뜻한 동네에서 제주 갬성을 먹으며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남쪽 제주에 집을 구해 백년해로해도 좋겠다.


북쪽과 남쪽 제주의 습도차 말고도 도심과 시골의 문화 차이도 큰 이슈다. 제주의 한달살이나 일년살이가 아닌 '평생살이'라면 명심해야 할 것이 '일상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다. 돌담 산책이나 오름 걷기, 해안도로 드라이브, 스쿠터 여행, 스쿠버 다이빙 같은 것이 좋아 매일 할 수 있다면 시골도 좋다. 하지만 요가, 필라테스, 드로잉 수업, 독서모임, 쇼핑 등 도시에서 갖던 문화생활을 비슷하게 즐기면서도 제주에 살고 싶다면 도심이나 도심과 멀지 않은 곳이 좋다. (사실 일년살이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사는 시골에선 배민, 요기요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카카오택시도 안 잡히는 때가 많고, 뭘 배우고 싶어도 학원이 없거나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왕복 세 시간의 거리로 미술 수업을 들으러 제주시에 온다. 내가 다니는 미술학원은 집에서 차로 8분이다. 그래도 시골은 바다와 가깝잖아요!라고 물을 것이다. (보통 외지인들은 제주 '도심'에 대한 알러지 같은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제주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내가 얹혀)사는 집은 아파트 8층이고, 거실의 통유리로 제주의 북쪽 바다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해안도로까지는 차로 15분, 공항까지의 거리도 차로 12분. 다양한 커뮤니티도 당연히 도심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제주에서 귤나무 보며 낭만만 뜯어먹으며 살아도 좋다거나,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고즈넉하게 남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면 시골살이를 적극 추천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하려 든다면 제주 도심라이프도 꽤 괜찮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제발, 제주도에 살고 싶어. 제주도에 집을 사고 싶어. 어디 사면돼? 같은 '남에게 자기 인생 맡기는' 질문 말고, 일단 와서 좀 살아보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도박 같은 이주를 택해서 제주살이에 실패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할 말은 했으니, 다시 내 문제로 돌아온다. 우리 가족 모두는 이제 제주시에 살고 있어서, 서귀포에 집을 구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건 사적인 고려사항) 제주시 도심, 내가 다니는 세 개의 학원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오피스텔을 알아보기로 했다. 일단 일 년만. 이 동네는 2년 동안 제주의 이방인으로 살면서 매우 만족한 동네다. 단정한 동네 풍경, 커피맛과 예쁜 맛을 갖춘 카페가 많고, 도심이라 모든 것이 편리하며, 하천 주위로 산책길과 운동 트랙이 잘 갖춰진 곳이다. 바다는 차로 15분. 이 정도면 내겐 최고다. 그 동네에 집을 사기로 했다. 3년 후. 이건 목표다. 갑자기 열심히 일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마침내 가족의 집에서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자 억지로 끌고가던 일상에 오히려 호랑이 기운이 솟는다. 열아홉 살 이후로 나는 제주에 '살아'본 적이 없다. 일 년에 한두 번 가족을 만나러 잠시 들렀을 뿐. 이제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고향에 나는 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팬데믹 때문에 내 인생은 느닷없이 절단이 되었지만, 그 절단면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싹이 튼 것 같다.


따뜻한 어느 봄날, 남편이 한국에 잠시 돌아오면

조카가 자기만의 공간을 되찾았듯

우리도 이제 우리만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