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의 희망문구
반편성이 좋지 않아요. 이모.
고3인 조카 1호가 낙심한 듯 말했다.
몇 반인지가 중요하니?
네. 원하는 반이 안됐어요. 그것도 중요하거든요.
아 그렇구나. 그런게 있구나.
잘은 몰라도 내 입시 때와는 달라 보였다.
이제 일 년도 안 남았는데 시작부터 운이 없어요.
출발선에서 스타트 타이밍을 놓친 선수처럼
조카의 목소리에 맥이 빠져있었다.
격려를 해주고 싶었다. 이모로서. 어른으로서.
"첫끗발이 개끗발이다. 조카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첫끗발. 개끗발.
단어만 들어도 딱 느낌이 오지 않니?
처음이 좋으면 나중에 개....
아니아니. 안돼. 미성년자야, 정신차려.
시작이 좋다고 마지막까지 좋은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반대로,
처음의 불운이 끝까지 가는 것도 아니라는 거지.
첫 행운에 들뜰 필요도,
첫 불운에 슬플 필요도 없어.
좋은것도 나쁜것도 영원한 건 없는 법이니까.
포장이 얼추 잘 되었다. (마음만은 진심이었어)
아....그러네요?
마지막이 더 좋을 수 있죠!
다 커 보였던 조카인데, 나보다 키도 큰데,
그 표정이 너무도 순수했다.
십대 소녀는 이모의 저속한 비유를
긍정적인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그러면 됐지.
언니가 옆에 있었다면
야! 소리와 날아왔을 등짝 스매싱.
애들한테 자꾸 니네 광고업계에서나 쓰는
비속어, 비표준어, 신조어 같은 것들을 뱉는다고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다.
(어머님, 쟤들 학교 가면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래도 이모의 격려는 조금 통한 듯 보였다.
엄마의 사랑 담긴 잔소리보다
이모의 저속한 격려가 때로는 먹히는 법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데,
카톡! 울리는 조카 1호의 메시지.
"이모! 낮에 해줬던 그 말이요.
처음이 안 좋아도, 나중엔 잘 될 수 있다던 그 문장.
그거 보내주시면 안돼요?"
뭐??
마치 그 문장을 책상머리에 붙여놓기라도 하려는 듯
조카는 궁서체였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 문장은 안돼.
그게 책상에 붙어있는걸 엄빠가 보기라도 하면,
그 문장의 출처를 추궁이라도 하면,
이모에게 '조카 면접교섭권'이라는 게 있다면,
이모는 접근금지야.
'한글 맞춤법엔 예민하게 굴면서도
유행어 비속어는 남발하는'
이상한 카피라이터 이모니까.
조카에게는 끝내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냥 가슴으로 기억해라.
다음날, 언니 가족들과 점심을 먹는데
자신의 '희망 문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조카는
기어이 엄빠 앞에서 다시 내게 물었다.
실토했다.
다행히 언니와 형부는 깔깔대며 웃었다.
노름판에서 시작된 인생의 한 줄기 조언은
그렇게 고3의 한줄기 희망이 되었다.
그렇게 나도 조카에게 배웠다.
코로나 시국의 첫끗발은 내게 참 좋지 않았다.
상하이 대탈출, 공황장애, 남편과의 3년째 이별, 백신 후유증까지.
팬데믹은 엔데믹을 향해 달려간다지만
아직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재 진행형에 있다.
그러나 조카의 마음자세로,
내가 뱉은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끝까지 나쁘라는 법은 없잖아요. 이모.
조카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도,
조언을 누군가에게 해줄 줄만 알았지
스스로에게 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개끗발은 아닐 겁니다.
나의 엔데믹에도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