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Jun 04. 2024

제가 잘할게요


어제는 오랜 고객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디자인 일이 뚝 끊겨서 벌이를 거의 하지 못한 채 상반기를 보내고 있다. 일이 없는 김에 놀아도 보고, 여행도 다녀오고, 그러다 불안해서 아르바이트 구직활동도 해보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반백수로 지내기를 두어 달. 사지 멀쩡한데 밥벌이를 안 할 수 없다는 도의적인 책임감과 실제로 생계가 위태로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자꾸 무어라도 해야지 하고 등을 떠민다. 그리하여 일 년 반쯤 전에 써먹었던 방법을 다시 꺼낸 것이다. 디자인 일을 의뢰한 적이 있는 고객들에게 ‘00웍스 여기 잘 살아 있습니다’ 라는 뉘앙스의 메일을 100통 정도 보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건 어쩔 수없다. 나에게 잘해주었던 고객, 나를 힘들게 했던 고객(많지 않지만 이분들께는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고되지만 보람 있었던 작업, 한계를 느꼈던 작업, 즐거웠던 작업들...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이, 그리고 아프게 생각나는 것들은 내가 잘 못해주었던 일들이다. 나의 옹졸함, 뾰족함, 자격지심, 방어기제들이 누군가를 힘들게 했을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당한 아픔은 지나면 웃으며 나누는 얘깃거리 정도로 되기도 하는데 내가 준 아픔은 영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 관계를 들추는 것은 그래서 힘들다. 묵은 감정들까지 소환해 버릴까 무섭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더 ‘좋은 사람’이 됐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드물게 일이 하고 싶다. “노는 게 젤 좋아!”를 외치던 나도 이제는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 일을 할 수 있다면 감사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저 그때와 다른 사람이에요. 까칠하지 않아요. 친절해요. 제가 잘할게요. 그러니 일 좀 주세요.’라는 심정이다. 물론 이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일이 몰려온다면 이렇게 말했던 나를 또 잊어버리고 “이제 그만~!”을 외칠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사람이니까.

 

어제 메일을 보낸 김에 오늘도 작업실에 와 컴퓨터를 켰다. 회신을 준 고객은 없다. 무엇을 할까, 미뤄둔 아이 성장앨범을 만들까, 해묵은 사진을 정리해서 여행사진집을 만들어볼까, 그러다가 한글 문서를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출간한 <오늘의 밥값> 연재의 첫 시작도 이러했던 것 같다. 코로나로 작업이 뚝 끊긴 어느 날, 작업실에서 열었던 한글 문서가 나의 책의 첫 시작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역시 사람은 한 치 앞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밥값을 하고 있는가’가 나의 화두다. 아마 평생의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밥값, 밥벌이, 먹고사니즘... 한때는 평생 이 고민을 해야 하는 내 삶이 측은하고 억울하기도 했다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는 한 번쯤 하늘에서 빛나는 동아줄이 내려왔으면 하고 바라본다. 해뜨기 전 새벽이 가장 춥다는데 지금이 그 새벽이 맞는지, 아니면 아직 덜 왔는지, 이보다 더 추워질 건지 그거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동아줄이 오면 타고 올라갈 근육은 있어야 하니까, 해 뜨는 걸 보려면 창문을 열 기력은 있어야 하니까 매일 뭐라도 한다. 식단 관리도 하고 실내자전거도 타고. 어제부터는 작업실 컴퓨터도 켰으니, 역시 시작이 반이다. ​이제 일만 들어오면 되겠다.



주마등같은 과거의 작업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