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지향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비건 지향인으로 살고 있다. 말하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점심에는 95% 비건(육류를 비롯해 계란, 유제품, 해산물 등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음), 저녁에는 95% 페스코(육류를 먹지 않고, 계란, 유제품, 해산물은 섭취함) 정도로 살고 있다. 하지만 외출 혹은 외식을 할 때에는 먹고 싶은 대로 먹기 때문에 그 또한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쯤이면 밝혀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완벽하지 않음’은 어쩌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꽤나 매력적인 일일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완벽을 지향했다면 이만큼의 시도도 절대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식사는 건너뛰거나 사과 반 개를 커피와 함께 먹는다. (나름 간헐적 단식을 한다고 아침을 먹지 않고 커피 한 잔으로 때운 세월이 꽤 오래됐는데 빈속에 커피를 먹는 것이 위를 상하게 할까 염려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량의 아침식사는 오전 내내 배를 더 고프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점심은 가능한 한 샐러드다. 토마토, 과일 한 가지, 오이나 잎채소를 기본으로 해서 견과류, 당근, 시리얼 등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집에 있는 재료를 첨가해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 레몬즙을 뿌려 두유와 함께 먹는다. 전에는 꿀을 뿌리기도 했는데 단맛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이제는 거의 넣지 않는다. 집에 치즈가 들어오는 경우 가끔 넣기도 하고, 단백질이 너무 부족하다 싶을 때에 우유나 계란을 먹기도 하기 때문에 100% 비건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최대한 동물성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드레싱이 있지만 마요네즈나 요거트를 이용하고 단 성분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올리브오일 위주의 드레싱을 만들어 먹는다. 외출을 할 때에는 가급적 샐러드 도시락을 만들어 들고 나간다. 비건 지향인이 되기 전에도 샐러드를 자주 만들어 먹었지만 지금의 방식이 재료도 단순하고 만들기도 쉬워서 훨씬 수월하다. 냉장고 안도 이것저것 재료를 쓸 때보다 단출해졌다.
저녁은 최근 식단 관리를 시작한 남편과 함께 고등어나 삼치(가끔 오징어), 그리고 두부를 구워서 50% 현미밥과 함께 간단하게 먹는다. 아이에게만 돈가스나 떡갈비 같은 속세의 음식(?)을 제공한다. 우리 부부는 식탐이 많은 미식가 타입이 아니라서 고등어와 두부만 차려진 식탁에서도 “맛있다, 맛있어” 하며 먹는다. (남편은 고봉밥을 리필해서 먹는다...!) 이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재료의 맛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맵고 짜고 달달한 고기 위주의 식사에서 생선과 두부 위주의 식사로 바꾸고, 식사 후에는 과일을 깎아 독서 시간을 갖는 이 건강한 생활을 우리는 퍽 만족해하고 있다. 채소와 과일 값이 고깃값보다 더 비싸게 느껴지는 요즘이지만 그래서인지 과일, 채소를 사서 냉장고를 채울 때 어쩐지 부자가 된 느낌이랄까, 나 자신에게 엄청난 대접을 해주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마트에서 저렴하고 간편한 간장불고기, 양념갈비, 닭갈비, 고추장삼겹살 같은 것을 잔뜩 사서 냉장고에 쟁여놓던 때보다 지금이 더 풍족하다고 느낀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비건 지향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설명의 피곤함’도 한 몫 한다. 육식, 미식이 당연시되고 마치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것처럼 이야기되는 세상에서 이런 생활은 고독하다. “살은 남의 살이 맛있다”라는 우습지도 않은 말이 우스개로 사용되고, 고기나 햄버거를 몇 인분까지 먹을 수 있느냐가 자랑을 넘어 돈벌이 마저 되는 세상은 때로 무섭기까지 하다. 나는 촌스럽게, 혹은 꼰대처럼 그런 걸 보며 ’지구 반대편의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데…‘ 라는 생각을 하지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나 또한 특별한 날 치킨을 찾고, 아직 고기와 동물성 제품을 먹고, 여전히 빵순이이고, 때로 맛집을 찾아다니며 즐기기도 하고, 티브이 속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그 나라의 음식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육식은 -자연 목축이라던지- 문화적인 영역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육식 그리고 미식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활, 그러니까 ’비건 지향 생활‘을 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나는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공장식‘ 축산과 ’과도한‘ 육식 문화에 반대하기 때문. 그 배경에 환경오염에 대한 염려, 동물권과 생명 존중의 문제, 건강의 문제, 다양성의 문제, 인류애의 문제 등 더 깊은 이야깃거리들이 있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기에는 지식도 얕고 신념도 얕기 때문에 그저 단 한 줄로 설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순해 보이는 그 한 줄이 누군가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쉬운 방법으로 나를 그저 ’건강한 식생활‘을 추구하는 사람 정도로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정치적 무게가 너무 부담스러울 때 나 자신을 속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내 건강을 위해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한편, 요즘에는 ’비건‘ 혹은 ’건강‘ 또한 공장화 되어서 수많은 비건 지향 가공식품, (콩고기, 버섯고기와 같은)대체육을 이용한 가공식품, 대체당을 이용한 식단관리용 가공식품들이 나온다. 자연의 식재료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도 비건식이 가능할 만큼 가공식품이 발달해 있다. 어찌 보면 발전일 수도 있고, 채식인과 건강 지향인들에게는 손쉬운 선택지가 많아져 편리함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얼마 전 한 비건 제품 박람회를 다녀온 결과 가공식품(+시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쓰레기 문제를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고, 온갖 첨가물로 만들어진 가공식품들로 대체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라는 의문이 여전히 있다.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건강하지 않은 채식 - 예를 들어 감자튀김이나 감자칩 같은 가공식품들 위주의 채식을 정크 비건이라고 부른단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나는 기왕 건강(과 여러 가지의 가치)을 선택하기로 했기 때문에 가공식(설탕과 정제 밀가루 포함)을 멀리하기로 했고 이런 나의 식생활을 요약하여 어려운 용어 대신 ’자연 채식 지향인‘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채식인‘이 아니라 ’채식 지향인‘인 이유는 역시 ’완벽함‘에서 출발해서는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단지 그것을 향해 가는 사람일 뿐이다. 내게 강요한 이도 없고,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며 즐겁게 걷고 있다. 되도록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같이 가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방식은 저마다 달라도 좋다. 일주일에 한 번 채식을 한다거나, 한 달에 하루 고기나 가공식품 없는 날로 살아보거나. 다양할 수록 좋겠다. ‘다름’은 ‘완벽하지 않음’ 만큼이나 아름다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