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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독증에 걸렸다

다 때가 있을 것이다

by 수달씨


요즘 난독증에 걸렸다. 책이 읽히지 않는 것을 넘어 책을 향해 손을 뻗어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도무지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둔 소설*책은 한 달이 되어가도록 넘기질 않아 표지 위로 뽀얀 먼지만 쌓였다. 가방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얇디얇은 여행가이드 책**도 얼추 한 달 됐는데 아직까지 작가의 여행 첫날에 머물고 있다. 가방 속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느라 귀퉁이가 닳아가는 책을 보며 애잔함과 동시에 민망한 감정이 들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읽게 되질 않는 걸.


내가 사는 경기도에서는 도민들이 책을 읽고 지역서점에서 책을 사도록 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서인지 책 포인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리뷰를 쓰거나 하면 200원,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거나 지역서점에서 책을 사면 1000원 이런 식으로 포인트를 준다. (포인트를 모아 지역서점 책 구매에 이용할 수 있는 착한 선순환 시스템이다.) 그 어플에 자신의 독서 목표를 쓸 수 있는데, 처음 시작하던 날 나는 아주 약소하게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라고 적었었다. 열 페이지가 아닌 한 페이지인 게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적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지키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줄 몰랐다. 하루에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한 지가 몇 주 째인가.


이렇게 된 것에는 사실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연말이라 작업이 많아지면서 시간과 에너지가 본업에 집중되기도 했고, 그 좋아하던 쇼핑 버릇이나 덕질하던 버릇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내려놓으면서 뭔가 기력이 달리는 느낌이랄까? 전처럼 무엇에 기차화통마냥 에너지를 내어 달려갈 수 없는 것이다. 달리기를 하던 30대 청년에서 지팡일 짚고 걷는 70대 노인이 된 것 같다. 거기에 아이가 하던 휴대폰 퍼즐게임이 재미있어 보여 설치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밤마다 침대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지고 만 것이다. 게임이든 드라마든 안 하면 안 했지, 뭔가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한번 담근 발을 빼기가 쉽지 않다. 게임 어플을 지웠다 깔았다를 몇 번 반복하다 다행히 어느 순간 정신이 차려져서 지금은 안 하고 있지만 그 공백을 독서로 메울 준비는 아직 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책에 손이 닿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습관을 어느 정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의무감 혹은 ‘애서가라면, 책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하던 마음도 어느 정도 내려놨다. 하고 싶은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니 기다려보자 하는 마음이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라서 상태라서 이 글도 실로 오랜만에 적는 것이다.)


책 구매도 전보다 확연히 줄었다. 나같이 책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책을 사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출판시장이 돌아가겠느냐 하는 마음도 다 허영이고 요즘 말로 자아 비대증(?)일 수 있겠다 싶다. 나 아니어도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겠나. 내 앞가림이나 하자.


책을 전처럼 양껏 사지 않으니 읽어달라고 줄 서서 아우성치는 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빨리 읽고 싶은 책은 몇 가지 있는데 (침대 옆에 한강 소설이라던지...) 그럼에도 의무감으로 읽고 싶지는 않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책이 있으니 아무렴 어때.***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뭐.


이런 때에, 내가 호감을 갖고 지켜보던 박정민 배우가 서점을 하더니 책도 내고, 출판사도 하고 그러더니 급기야 최근 한 영화제****에서 화사 씨와 공연을 하면서 좋은 의미로 빵 하고 터져버렸다. 사람들 말로 청룡열차를 타버렸다. (인기가 치솟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번 이 배우에게 입덕하면 내려오질 못한다는 뜻이 강하다.) 동종업계(?)라 반갑고 가깝게 느껴지려고 할 때에, 만나보기도 전에 유명해져 버렸달까. 많은 책 애호가들이 이때다 하며 북페어 등에서 찍은 박정민 씨 사진을 공개하거나 만남을 인증하며 자랑하는 이때에 나는 방구석에서 난독증으로 굴러다니며 이들을 배 아파하고 있으니...


아무튼 그렇더라도 나는 나의 때가 있다고, 언젠가는 그때가 오리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다린다. 도서관에서 포인트나 받아볼까 하고 빌려온 책들이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은 채 식탁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어도, 때가 오면 먼저 읽으려고 책장 한쪽에 모아놓은 책들 위로 뽀얀 먼지가 쌓여가도. 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의, 그날의 에너지를 위해 충분히 쉬어둔다. 지금의 쉼은 결코 게으름이나 무의미가 아님을 믿는다. 나를 내가 아니면 누가 믿어주겠나.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의 리스본>

*** 문득 책의 장점이 이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읽고 싶은 책은 언제고 읽을 수 있다. 절판이 될 수는 있지만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찾아볼 수도 있으니. 요즘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이라고, 지금이 아니면 이 가격에 살 수 없다고 여기저기서 지갑을 열라고 아주 난리인데 책은 그런 면에서 참 착하다. 그래서 출판시장이 어려운건지도 모르겠다. 책이란 존재가 너무 착하고 자본주의적이지 못해서.

****2025 청룡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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