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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달 Sep 30. 2022

왜 상사는 내 보고서 까기에 그토록 진심일까

보고서 쓰는데 과하게 신경쓰는 건 소모적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문서보다 실제 업무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텐데 수달도 같은 생각이다. 상관에게 조사 하나하나 꼼꼼하게 지적 받고 있노라면 이게 다 뭔가 싶을 때가 있다.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이 표현은 저 표현으로, 이 문장은 저 문장으로 이리저리 바꾸라는 상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백번 양보해도 상관은 내 보고서 까기에 진심이다. 1시간 가까이 쩔쩔매다 나오니 보고서로 칭찬도 받고, 칼퇴근도 하고, 우리부서 에이스로 거듭나 보자는 애초의 다짐들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다. 밤늦도록 사무실에 남아 알아보기도 힘들게 받아적은 상관의 코멘트를 노려보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문득 ‘이게 진짜 맞아?’라고 몇 번 되뇌다 보면 동기는 금세 휘발되고 만다. 인정이니 증명이니 안 받아도 되니 집에만 가고 싶다. 보고서 잘 써야 하는 이유를 ‘내’ 입장에서 암만 찾아봐야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제 내가 아닌 ‘상관’ 입장에서 보고서 잘 써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자. ‘그래 그럴 수 있겠어’라고 납득 할 만한 이유를 말이다.           

최후의 보루     

보고서에 담긴 업무나 사업이 순조롭게 흘러갈 때,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황에서 보고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단순 확인이 필요한 반복된 업무 문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매번 새로운 에너지를 쏟는 건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업데이트되는 사항만 확인하는 정도만 돼도 충분하다.      


그런데 보고서에 담겨진 업무에 문제가 생길 땐 얘기가 달라진다. 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특히 여러 부서나 기관 또는 다른 업무와 엮여 있을 때 특히 그렇다. 그건 우리 소관 아니라고, 우리 책임 없다고 해야 하거나 반대로 그건 우리 일이라고 주장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보고서에 어떻게 기재돼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보고서를 봐도 명확하지 않으면 소모적인 공방이나 다른 차원의 파워게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신과 육체 모두 피곤해지는 일 들이 펼쳐지게 될 수 있으니 미리 보고서를 꼼꼼히 작성해 놓는 게 좋다.     


예를 들어보자. 담당자가 사업이나 행사에 필요한 부서별 협조사항을 보고서에 두루뭉술 써 놓았다. 사실 담당자는 사전에 A, B, C 부서와 충분히 구두 협의를 진행했기 때문에 보고서에는 꼼꼼히 적지 않아도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보고서에는 "관련부서(A, B, C)는 원활한 사업 진행에 적극 협조"라고만 해놓았다. (설명을 위해 극단적으로 두루뭉술 적어봤다)  이후 사정이 달라졌을 수 있고(담당자가 바뀌었을 경우가 많음), 구두로 의견을 나누었다 보니 구체적인 협조 내용이나 정도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을 수 도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협조업무를 해보면 협조를 구하는 입장과 협조를 해야 하는 입장의 극명한 온도차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주최측이 기대한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막상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거나 행사를 목전에 앞두고 갈등이 생길 때가 있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전협의 단계에서 의사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정확하게 문서화해 놓으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관련부서 협조사항이라는 꼭지를 따로 뽑아내 A부서는 행사 촬영 및 언론홍보 협조, B부서는 행사 당일 참석자 안내 보조 협조, C부서는 세션 별 회의자료 요청 시 제출협조 등으로 말이다. 문서로 명확히 해 놓으면 진행 과정 중에도 좀 더 적극적인 협조를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상관에게 칭찬받고 칼퇴근하기 위해 보고서를 잘 써야 한다는 건 피상적인 이유다. '책임 소재'와 직결되는 문제가 생겼을 때 보고서가 최후의 보루라 생각해보라. 날카로운 눈으로 내가 쓴 보고서를 살펴보는 상관 마음을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상관은 지금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것.         

 

나침반     

보고서 텍스트(text) 아래에는 맥락(context)이 있다. 이 보고서가 어떤 취지로 시작했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누가 관심을 가졌는지 등 글로 남기기 애매한 맥락들이 녹여져 있다. 상관과 담당자가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계기나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담당자가 보고서를 두루뭉술 써놔도 상관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보고서를 작성하는 담당자나 보고 받는 상관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바뀌면 동일한 보고서가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보, 이직, 퇴사, 배 째... 다양한 이유로 담당자는 바뀐다. 사업을 지시한 상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업의 최초 콘셉트나 맥락을 명확하게 담지 못한 보고서를 가지고 진행하는 사업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마치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보고서를 대충 쓰고, 후속처리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가 아니라면 업무 지속성이 보고서만으로도 충분히 담보되도록 꼼꼼히 작성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해석의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다.  보고서는 조타수는 바뀌어도 항로가 변화되지 않도록 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보기엔 그게 그거 같은데 상관이 표현을 고치라던가 내용을 좀 더 추가하라고 할 때가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피드백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관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이다. 

         

의사결정의 첫 단추     

보고서는 결국 상관이 의사결정을 하도록 도와주는 문서다. 작성중인 보고서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작성 방향이 맞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다. 보고서만을 위한 보고서 작성만큼 허무한 게 없으니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할 때는 보고서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수천억 단위 금액이 투입되는 프로젝트가 한 장 보고서로부터 시작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때 보고서는 결정권자가 예산과 인력을 배정하도록 설득하는 첫 단추가 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그것을 담은 보고서가 오타 투성이에 논리도 엉성하면 좋은 첫인상을 남기기 어렵다. 첫인상이 별로면 “왜 결재해줘야 하는지”를 더 엄격하게 따지는 험난한 여정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     


보고서가 '선택'의 갈림길에 첫 단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고서 단어 하나로 다양한 가능성 중 무엇이 선택되는지 결정되기도 한다. A라는 서비스를 주민(혹은 고객)에게 제공키로 하면서 a, b라는 요건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하자. "a, b조건 충족 시 A 제공"이라 작성했다면 상관에게 한 소리 들을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다. 

     

a와 b를 모두 갖춰야 A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a나 b 중 하나만 갖춰도 A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표현만으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쓴다고 콤마로 연결할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딱딱한 표현이겠지만 "a 또는 b 자격을 갖춘 대상자에게 A 서비스 제공"이라 해놔야 비로소 명확해진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보고서를 써야만 그 자료를 근거로 상관은 판단 내릴 수 있다.     


아울러 한정된 예산과 인력에 대한 기득권을 기존 업무가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예산과 인력을 새로운 사업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도 잘 만들어진 보고서가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상관은 당신이 쓴 보고서를 근거로 결정을 내리거나 혹은 그 내용을 더 높은 상관에게 보고하고 판단을 구하려는 입장에 있다. 두루뭉술하기만 한 보고서를 근거로 어떤 결정과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알고 보면 상관도 힘들다        

30년 가까이 공직에 계셨던, 퇴직을 앞두고도 항상 에너지가 넘치던(이라고 쓰고 보고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고 읽는)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수달아, 조사니 오타니 이런 거까지 꼼꼼하게 집어내 뭐라고 하니 싫지? 나는 오죽하겠니 몇 십 년 이런 글만 보다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눈에 걸리게 돼서 그렇다. 보고서 잘 써야 한다"

     

그저 보기 좋은 보고서 만드려고 30년 가까이 보고서와 씨름한 게 아닐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쓴 보고서를 검토해야 할 입장이 될 때가 있을 것이다. 괜히 딴지를 걸어보면서 ‘엣헴’ 거릴게 아니라면 왜 상관이 보고서를 그토록 꼼꼼하게 챙기는 이유부터 이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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