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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달 Feb 26. 2022

보고서는 일기가 아니죠

출제 의도

문제풀이의 기본 중 기본이 '선지를 꼼꼼히 봐야 함'이다. '옳은' 것을 고르란 건지, '옳지 않은' 것을 고르란 건지 정반대로의 답이 내려지지 않도록 선지를 잘 봐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장이 아닌 한 윗사람이 낸 불친절한 지시 의도를 잘 파악해야 쓸데 있는 곳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


어젯밤 공부한 내용이 시험에 떡하니 나오니 가슴이 뛴다. '올게 왔다'.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문제를 꼼꼼히 읽어보지도 않은 채 답안을 작성하고 시험장을 나왔더니 수달은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어떤 때는 문제가 너무 어려워 어떻게든 문제 안에서 단서를 찾아보려 한 글자 한 글자를 보물찾기 하듯 들여다보며 꾸역꾸역 답을 썼더니 점수가 좋았다. 전자는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아는 내용만 신나게 쓴 경우이고 후자는 내용을 잘 몰라도 문제를 꼼꼼히 읽으면서 최대한 그에 맞게 쓰려고 고민한 덕분이다. 내가 아는 것만 쓰다 보니 과정은 신났으나 결과는 참담했던 것


파일로 줘봐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상관이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맥락(context)을 잘 고려해야 한다. 모든 지시에는 이유가 있는데, 상황 속에 그 이유가 숨겨진 경우가 많다. 그런 맥락을 읽지 못하면, 적어도 그런 맥락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소위 '핀트'가 나간 보고서가 만들어진다. 


'코로나 상황에서 이번 행사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한번 검토해봐'라는 지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보고서를 준비해야 할까. 꼼꼼한 시간계획을 원하는 걸까, 행사 여부를 검토해 보란 것일까? 만약 상관의 의도가 후자였다면 의도와는 정반대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고하게 될 것이다.


최악은 보고서를 본 상관이 파일로 달라고 할 때다. 한두 군데 피드백을 줘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할 때 본인이 고치는 게 낫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절대적인 수준이 떨어진다기보다는 '핀트'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크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수달아, 너무 오래 붙들지 말고, 쓰고 싶은 대로 써서 빨리 가져와 봐'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다. 너무 애먹지 말라는 배려였겠지만 네가 뭘 가져와도 수정하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져 왠지 모를 서운함과 반항심이 생겼다. 그 탓일까? 의식의 흐름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갔더니 상관 동공이 흔들린다. 조심스레 묻는다 '이거.. 쓰다 말고 가져온 건 아니지?


상관이 원하는 바를 대강 파악하면서도 적당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춘 초안을 짧은 시간에 쓰는 건 쉽지 않다. 상관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빨리 방향을 돌릴 수 있도록 빨리 쓰자니 완성도가 구리고, 완성도를 갖추자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이거 말한게 아닌데 왜 이렇게 오래 보고서 가지고 있었냐는 핀잔 들을 수 있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내 볼품없는 초안을 상관에게 들고 가기 싫어한다. 쏟을 수 있는 역량이란 건 모조리 쏟아 붓고서야 '일단 대충 초안 정도 수준으로 작성해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들이니까. 그러나 경험상 초안 보고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완성도를 높이려는 욕심은 결국 내 기준일 뿐이기 때문이다.     


상관은 어떤 감정일까. 보고서 작성을 지시할 땐 완벽한 보고서를 써오리라 응당 기대할까? 아무리 잘 쓴 보고서를 들고 가도 자신의 존재감 확인을 위해 수정 의견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벽한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 필요가 있다. 그래야 상관도 초안을 피드백 하는 게 부담이 적을 테니 말이다. 담당자는 큰 에너지를 쏟지 않고 상관은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빨리 피드백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가 좋다.  담당자가 머리 싸매며 애써 만든 보고서를 죄다 뒤흔드는 걸 좋아할 상관은 많지 않다.    

      

마음 편히 갖고 시작하자     

쓰다만 느낌을 줄 정도는 아닌 초안이면서, 방향이 틀리면 조정하기도 어렵지 않을 만큼의 초안이어야 한다. 쉽지 않다. 적당한 고민과 적당한 에너지 쏟는 게 어디 쉬울까. 완벽한 초안이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으로 힘을 빼보자. 해밍웨이도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초안은 쓰레기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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