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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재회, 또 다시 각자의 길로

by 씨디킴

한 팀원이 다가와 이병 계급장 위에 대위 계급장을 붙여주었다. 정우는 흠칫 당황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평촌 일대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기적같이 살아남은 카페가 보였다. 정우는 2층을 카페테라스를 올려다보며 커피 향을 상상했다. 모든 경계가 커피 한 잔에 무너졌다.


“올라가 볼까요?”


“됐어. 됐어.”


평촌에 투입한 아군은 적과의 구별을 위해 각자의 표식이 있었다. 그들은 특별한 낙인을 찍어야 서로 겨우 구분할 정도였다. 꽤나 슬픈 일이다.

2층에서 누군가 정우 일행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쏠까요?”


“아직! 응? 박정우 대위…”


최철현 상좌는 박정우 대위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들은 18년 전 남북 군사교류가 진행될 당시, 이 주일간 함께 지냈다. 주먹다짐은 잠시였고, 승부는 내지 못했었다. 그렇게 헤어질 즈음엔 누구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삼켰었다.


“안녕이네, 서울 사기꾼 자식!”

“잘 가라! 평양 양아치야!” “하하하하하.” “잘 가고 / 기래. 또 보자우.”



정우 일행이 카페에 들어서자, 2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이~~ 서울 사기꾼!! 오랜만이야”


“쏘지 마라!” “쏘지 마!”


철현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정우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잃어버린 현실감을 주워 담았다.


“이, 양아치 새끼.”


“야 이 동무들. 이 카페는 짐부터 비무장지대야, 야. 그 거이 내려 놓으라우.”


“얘들아, 니들도 그거 잠깐 치워라. 니들 쏘면 내가 이 형 죽일게.”


“그럴 수 있간? 하하하하하.”

에스빗 스토브로 아군 부대원이 물을 끓였다.


“니들은 이런 거 없지?”


‘일 없다.”


“내가 커피는 기가 막히게 내린다. 마셔봐.”


“이햐, 이 남조선 커피라 그런지 기름지구나 야.”


“난 신맛이 좋은데 말이지.”


“아, 들은?” “딸 하나, 아들 하나.”


“농사 잘 지었네.” “이제 열 살이다. 많이 늦었지?”


“보라, 이 녀석이다.” “엄마 닮았는 모양이네. 잘 생겼네.”


“근데 넌 아직 대위냐?”


“아니, 나 민간인이야. 배 나온 거 봐, 제대한 지가 언젠데.”


“근데 이게 왜 이래. 정예부대 애들이랑.”


“아, 퇴근하다가. 그렇게 됐어.”


“퇴근? 야야야 이 새끼 뭔 쉰소리를 하는 거니.”


“맞습니다. 민간인.”


707 부대원이 억울해 보였는지 끼어들었다. 커피 한 잔에 남북통일이었다.


“먼저 퇴근하라! 우린 3분 있다가 나갈 테니. 다신 보지 말자우. 친구.”


“다시 봐도 넌 안 쏠게, 양아치야.”


“난 쏠기야~ ㅋㅋㅋ.”


“간다.” “기래. 기래.”



정우는 군복을 벗었다. 대신 베레타 한 정을 가방 한편에 챙겼다. 부대원들과의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다시 퇴근길에 나섰다.


정우와 철현의 목적지는 같았다.


야음을 틈타, 철현의 부대는 범계역을 지나고 있었다. 적이 철수할 거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미군 드론과 위성까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하지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다만 아군의 위치를 파악하여 추측할 뿐, 그런데 그 추측은 정확했다.


정우는 안양천을 따라 금정역까지 걸었다. 세 번의 검문이 있었지만, 황준배 중령의 도움으로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철현의 부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산개했던 적이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철현의 부대를 주시하던, 드론 정찰병이었다.


“뭐? 사라져? 말이 돼?”


철현의 부대는 지하를 걷고 있었다. 범계역과 평촌역 등지에 산개했던 부대원들은 포탄에 뚫린 지하철 터널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파괴된 지하철 틈새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무모했지만, 가장 빠른 길이었다. 아군 주력은 그 시각, 안양천변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상태였다. 지하 터널은 금정역 근처에서 지상과 이어졌다. 그곳도 아군이 지키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철현의 부대는 금정역 지상 부근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 기다리는 듯했다. 호계근린공원 쪽에서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철현은 부대 일부를 나눠 안양천을 우회토록 했다. 그들의 역할은 단 하나, 동료를 위한 희생이었다. 총성과 함께 폭음이 이어졌다. 금정역을 지키며 졸린 눈을 비비던 아군도 호계근린공원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그때였다. 철현의 부대는 터널을 빠르게 빠져나와 금정역에 지키던 병력을 둘러싸며 급습했다. 방어선을 뚫은 그들은 재빠르게 산본종합시장을 지나 한얼공원에 올라 우리 군의 부대의 동태를 살핀 다음, 교각 철길을 따라 순식간에 산본역을 통과했다. 그런 다음 수리산역, 상록수, 중앙역을 거쳐 한대역 앞 안산천에서 보트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호계근린공원에서의 교전은 포병과 헬기 지원 끝나자 겨우 멈췄다. 성동격서의 전형이었다. 그 틈에 수리산역까지 진출한 철현의 부대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안산으로 가는 길목은 겹겹이 차단되어 있었다. 민간인 대피시설과 군 야전 지휘부로 활용 중인 초막골 생태공원은 마치 거대한 군사기지를 방불케 했다.


철현은 수리산 역 앞에서 멈춰 섰다. 등 뒤엔 몇 명인지도 모를 부대원들이 철로에 도열해 기관차처럼 열기를 뿜어 댔다.


“수리산으로 우회해 반월저수지로 내려간다.”


“초막골은 적 심장부다. 부대원은 즉시 산개해 적으로 위장, 수리산을 넘었다가 반월저수지에서 만나기로 한다. 해산!”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든 부대원이 산본 시내로 퍼져 나갔다. 아군처럼 짝지어 모여 다니고, 일부러 긴장을 풀고 대화하는 등 들키지 않도록 주의했다. 놀랍게도 단 한 사람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시민들 눈에, 심지어 아군의 눈에도 그들은 우리네 아들이자 아군의 모습이었다. 일부 부대원은 유유히 전투트럭까지 올라 편하게 초막골로 진입할 정도였다. 철현은 위장 신분증을 가슴에 품고, 태연하게 아군 부대원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가장 위험한 선택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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