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가고 싶은데

공황이 옴

by 씨디킴

나는 수학을 참 못했다.

화학도, 물리도, 다 못했다.

생물 좋아하고, 지구과학이 좋았다.


중학교까지는 수학도 곧잘 했다. 암기와 벼락치기가

통하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이과를 가고 공대를 갔다.

엉망진창.


내 뇌구조는 수학하고는 거리가 멀구나.

포기했다.


수능 수학 20문제 중에 4개를 맞고도 대학은 갔다.

물론 낙향.

제대 후에 편입으로 학력 세탁을 하기 전까지는

나는 수포자였다. (알고보니 내가 완벽주의자라 개념 이해가 없으면 포기 하기 쉬운 성격이라는데 다 핑계다. ㅄ)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누군가 내 대학 졸업을 의심하는 꿈을 꾼다.

나는 맞다고 우긴다(?). 돌이켜봐도 어떻게 졸업했나 싶다.

아직도 공학용 계산기는 쓸 줄도 모르며

원소와 원자를 두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며 강박이 온다.


그런 내가 플랜 B로 전공을 살려 무려 대기기사 시험에 응시했다.

1월 말에 원서접수를 하고, 오늘이 대망의 시험날이었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론과 씨름했다.

외계어 섞인 계산문제는 과감히 패스했다.


과목당 20문제, 총 4과목, 과락 40점 미만, 평균 60점이면 합격이다.

거의 비전공자나 아니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수준인 내 학습능력으로는

확실히 불. 가. 능.


그러나 AI와 함께 7년 치 기출문제를 분석하여 조금씩 점수를 높여나갔다.

물론 계산 문제는 포기.

모의고사를 봤다. 과목당 계산문제가 많게는 8개. 평균 6.5개 정도인데

2번과 3번으로 냅다 찍었더니 통계수치는 2.58을 기록하여

합격권에 들었다. 어라? 용기가 났다.


그렇게 웃으며, 나의 플랜 B의 관문인 시험장으로 향했다.

아침 1차 시험이었기에 주차장은 텅 비어있었다.

건물 앞에서 나이 지긋한 분이 인사를 한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연세 있으신 분이 시험에 도전했구나. 대단하다.'

내가 더 많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방정맞은 내 입이 포문을 열었다.


"파이팅!"

앙증맞은 포즈는 덤이다.


그런 그를 감독관으로 마주했다.


18... 어쩐지


대기실에서 30여 분간 대기를 타다가 8시 35분에 입실했다.

좌석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내 옆엔 이십 대 여학생이 쪽지를 들고

뭔가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CBT(요즘은 종이 시험이 아니다. 대충 컴퓨터 베이스 테스트란 뜻이다) 시험을 위해

모니터엔 내 신상이 떠 있었다. 8시 40분이 되면 시작할 시험.


바들바들...


시험 시간은 과목당 30분, 총 두 시간이다.

객관식이라 젊은 친구들은 한 시간 정도 되면 다 풀고

코를 판다고 한다. 제출 버튼을 클릭하자마자 합격 여부가 바로 뜨는 잔인한 시스템.

시작하면 한 시간 동안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주위를 둘러봤다. 뭔가 이상하다. 내 오른쪽은 하얀 벽이었고

왼쪽면도 벽만 보였다. 어라. 창문 없는 교실이네. 창문이 천장 쪽에 반원 모양으로

서너 개 붙어 있었다.


감옥이다. 여긴 MRI다.


십수 년 전 MRI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갔던 나는

관속에 갇힌 듯한 트라우마를 겪은 적이 있다.


교실문도 쇠문이었다.

39분...


나는 마침내 탈출을 감행했다.

'시험이고 지랄이고 여기 있다간 숨 막혀 죽겠다'싶었다.


맡겨둔 전화기를 주워 담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공황이라는 거구나.


오십몇점 언저리에서 불합격 메시지를 받을 각오로

응시했는데, 시작도 못하고 도망이라니...


4월엔 창문 크고, 환경 좋고, 널널한 시험장을 만날 수 있을까?

안정액이라도 드링킹해야 하나. 의사를 만나 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하나.


웬 김부장 퍼포먼스란 말인가.


2차 시험엔 계산문제까지 도전하라는 신의 계시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카시오 FX-991CW 공학용 계산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필기 쉽게 따고 실기에서 망하느니

이왕이면 80점대 맞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해야겠..


ㅈㄴ 하기 싫네.


실업자 주제에 공항 가서 해외여행은 못하고

공황에 빠진 나.


다음 시험 일정이 나오기 전에

집에서 가깝고 창문 있는 쾌적한 시험장을 찾아내야겠다.


아이씨... 쉬운 게 없네.

여러모로 등신 같은 나다.


봄인데..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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