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후 6개월
퇴직 후 6개월이 지났다. 일상에서의 시간은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 사무실을 나왔어도 예측하지 않은 일은 벌어지고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엄마와 남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병원을 오가고 식사를 챙긴다. 긍정의 에너지 수위를 확인해서 중간값으로 맞추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벌어지는 일들에 의연히 대처하기 위해 불안이나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인내심과 마음의 여유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6개월쯤 지나니 루틴이나 좋은 습관들이 스물스물 무너져 버렸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고 베란다에서 홈트를 하고, 요가를 하고, 주말이면 다구를 챙겨 뒷산 산행을 하면서 감정의 찌꺼기들을 모두 비웠었다, 작은 목표를 정해 쉬지않고 스스로를 푸쉬했던 동력이 서서히 사라져 바닥을 드러냈다. 그 에너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아이러니하게 직장에서의 팽팽한 긴장과 불안이 반대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열렬히 찾게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유지하도록 이끌었던 엄청난 에너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텐션이 사라지니 자동적으로 그것에 매달려 꾸러미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였던 것들이 와해되어 버린것이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결국 침몰해버리고만 배를 바라보는 것처럼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좋아진 것은 무엇이 있을까?
지난 주 건강검진에서 자율신경 균형검사의 결과가 달라졌다. 1년전 결과에서는 스트레스 지수나 피로도에서 "매우 나쁨"으로 빨간 불의 경고를 보낸 것들이 "매우 좋음" 또는 "정상"으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놀라웠다. 몸은 긴장과 불안에서 해방되어 신체 불균형 상태를 교정하고 평형을 되찾은 것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루틴은 망가졌지만 몸의 환희에 위안이 되었다.
일상의 리듬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으니 끌어올리는 일만 남아 있는 셈이었다. 6개월이 이완의 시간 또한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엄마와 남편의 질병앞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고 돌봄을 위한 내 에너지의 질과 양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희생하며 혼자만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구성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상의하고 가용한 자원을 모으고 나누는 것이다. 다만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 매순간 부드러운 언어를 선택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발짝 물러나 그 감정들을 관찰하고 제3자적 입장에서 진실과 따뜻함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다.
루틴에 균열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서두름과 강박때문이었다. 여전히 남을 의식하고 정돈된 일상안에서 일을 할때와 다름없이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옭아매고 있었다. 자유의지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명목뿐이었다. 새로운 환경안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원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새로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필요했다. 어쩌면 이러한 좌충우돌, 감정의 부침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한번 쯤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솟구쳐 오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바닥에서의 시간에서만 느껴지는 것들을 인지하고, 바닥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오르면 된다.
책상위 스탠드에서 퍼저나오는 따뜻한 노란빛을 바라본다. 엄마와 보낸 시간들은 따뜻하다. 내 마음을 쏟아 함께 보낸 시간들로 인해 아쉬움은 아주 얇아져 있다. 어쩌면 이제 여행을 시작하는 남편과의 시간도 이 여정을 밟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오랜기간 떨어져 지낸 부재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소통의 기술은 더 세련되어 지고 세밀함을 요구할른지 모른다. 퇴직후 6개월 '이완의 시간'에서 내가 배운 거라면 '서두르지 않는 않는 것'이다. 상대(대상)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꽃잎이 부드럽게 열리고 서서히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찬찬히 지켜봐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당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이완된 몸에게 좋은 차의 향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다시 루틴을 만들고, 찻물에 베인 향을 느끼듯이 하루 하루를 정돈해나가면 될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6개월이 아닌 되찾은 시간으로 자리하리라 믿는다.
아직 날은 새지 않았고 멀찍이 도로소음이 들려온다. 새 날이 온다. 다정한 나를 위한 시간들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