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소피 할머니의 시간여행

[제주도 한달살기 시즌1] 3화. 첫 손님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by 일상라빛

*2018년 작가의 제주도 한달살기 이야기를 시즌1로 기획하였습니다. 여행안내 책자에나 있을 법한 맛집 정보와 관광지 사진이 없습니다. 철저히 제주도민의 마음으로 살았고 그 시선으로 느낀 것들을 담았습니다.


*등장인물: 소피할머니, Kim여사, K(반려자), J(18개월 똥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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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집에 할머니가 사신다. 할머니 연세는 76세, 우리 엄마와 비슷했다. 농사일을 많이 하셨는지 허리는 굽으셨고 한쪽 다리는 절룩거리며 걸으셨다. 편찮으신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허수아비처럼 할머니에게 지팡이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와 안면을 튼 건 이틀 째 되던 날이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마을에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금방 표가 났다. 1층 집 숙소 앞에 하얀 차 한 대가 며칠 전부터 서 있던 것이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날이 좋든 안 좋든 폭우가 내리는 날이 아니면 현관문을 열어 두는 것이 이 곳의 일상이었으므로 그날도 문이 열려 있었다. 그 문 안으로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내 마음만큼 거실에서 놀던 J의 눈동자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와 그림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할머니였다! 노란 앞니 두 개 사이로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모습은 그야말로 하울의 소피를 연상케 했다. 우리의 첫 손님이었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목소리에도 나이가 드는 법. 쇳소리가 섞인 할머니의 말에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반은 웃음으로 반은 맞는지 모를 대답을 하고 난 뒤에야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궁금한 것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나 보다. 다행이었다. 얼른 몸을 일으켜 할머니께 쿠키를 선물해 드렸다. 찾아와 준 첫 손님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것이 소피 할머니와 첫 만남이었다. 이를 인연으로 산책하다 마주치면 인사를 드렸다. 18개월 J를 볼 때마다 얼굴의 잔주름이 더욱 깊어진 미소를 보이시며 예뻐라 해주시는 소피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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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제주에 사는 지인과의 점심 약속을 나갔다. 낮잠에서 깬 J와 오늘은 무엇을 할까 즉흥적으로 고민하던 중 집 앞에 메밀꽃 축제 현수막을 본 것이 생각났다. 옳거니! 산책 겸 걸어가면 되겠다 싶어 서둘러 나설 채비를 마쳤다. 현관문을 나서자 데크 위로 후드득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앗. 뿔. 싸. 오후부터 태풍이 불어온다는 소식에 행여 추울까 목도리에 양말에 운동화까지 단단히 준비했는데 꽝으로 돌아가는 찰나였다. 허무한 마음으로 의자에 걸터앉으려는데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비를 맞으며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피 할머니였다!


“안녕하세요”

반가운 마음에 힘을 주어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가던 방향을 틀어 내 앞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셨다.


“어디 다녀오세요?”

“잉. 밭에 일하고 오는 거당”

할머니의 손끝은 까맣게 흙 자국이 나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한 먹고사는 일, 노동의 흔적이었다.

“비가 오니까 오늘은 오전만 하고 파헸당”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제주는 변화무쌍하다. 그만큼 욕심도 없다. 하늘이 맑으면 온 하루를 꽉 채워 일하고, 비가 오면 그러려니 하루를 온 마음을 다해 먹고 놀고 쉰다. 흔한 제주 마을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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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데크에 철퍼덕 주저앉아 조약돌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런 J의 모습을 오늘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였다.


“나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한 것 없이 이렇게 늙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대사였다. 우리 엄마의 레퍼토리에는 없던 시퀀스에 당황스러웠다. 다음 씬은 어떻게 쳐낼지에 대한 감정은 대본에 없었다. 5초 정도였을까. 버퍼링이 계속되자 할머니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얼굴을 마주했다. 할머니의 시선은 J 와 나를 번갈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예상치 못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부러움과 회한이었다.



이미 늙었다 생각한 나의 이 순간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젊음일지도 모른다.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낯설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황야의 마녀 저주에 걸려 한 순간 젊음을 빼앗긴 소피처럼. 당황한 나만큼 할머니의 눈동자는 멈춰 있었다. 어쩌면 세월이라는 긴 시간의 저주에 걸린 자신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주름이 얼굴을 덮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씩씩하게 하울을 찾아 나서는 소피처럼 그의 해맑은 미소에는 담담함과 순순함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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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 고사리 손을 키우는 30대 후반의 엄마이자 여자이자 누군가의 딸이었던 나를 통해 소피는 꽃다운 젊은 어느 날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일시정지였던 감정에 한 줄기 빗 방울이 떨어졌다. 또르륵.


소피에게서 엄마 그리고 내 미래 모습을 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늙는다 막연히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주름살 깊은 할머니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하소연을 할 때면 으레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한다 치부했었다. 왜 그럴까? 질문에는 싫은 감정보다는 궁금함이 먼저여야 했다.


‘할머니 나이가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가 아닌 내가 꼬부랑 할머니처럼 늙는다면 어떤 감정일까?

한 번쯤은 궁금했어야 했다. 늙은이가 젊은이를 보며 가지는 감정. 그것은 소피 할머니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엄마에게 난 철저히 내 편이었고 엄마에게 엄마 편은 없었다. 나이가 드는 일은 누구나 감당해야 할 일이었지만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가졌으나 예상치 못한 감정이 찾아왔다. 기뻤지만 억울했고, 행복했지만 탈출하고 싶었다. 애 키우며 30대를 저당 잡힌 내 젊음을 할 수만 있다면 찾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을 담보로 시간을 내어주는 전당포는 없었다. 다만, 지나간 세월을, 애써온 시간을, 한 서린 기억을 홀로 삼키는 나와 마주할 뿐이었다. J와 나를 바라보는 소피 할머니처럼. 내 엄마에 대한 미안함, 젊은 날의 소피에 대한 서글픔으로 차올랐다.


20181003_163747.jpg 이미 늙었다 생각한 나의 이 순간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라던 젊음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얘기를 들어줄 사람, 누군가 필요한 외로운 현실이자 우리 미래의 모습이었다.



“한일이 왜 없으세요. 자식들 키우셨잖아요.”

“그래, 맞다. 자식 키우느라 바빴다.”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을까? 할머니는 맞장구를 쳤다. 입맛을 다시던 할머니는 기분이 조금 나아지셨는지 용감한 소피로 돌아왔다. 인생사 슬픔에서 기쁨으로 넘어갈 타임이다. 입모양을 보니 무언가 썰을 풀어낼 모양이었다. 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 광경. 어쩐지 감이 온다. 고단한 삶을 주제 삼아 마음 내키는 딸에게 전화를 수시로 걸어 하소연을 해오신 Kim여사 삘이었다. 방심한 틈을 타 훅 들어온 할머니의 삶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일 안 하고 노름을 해댔더래요~ 샤바샤바 아이샤바 할머니는 속상했데요~ 솰라솰라 아이 솰라 구박을 받았더래요’


할머니의 주름이 깊은 이유를 알았다. 그 시절 노름은 지금의 인스타와 같은 것이었다 보다. 기시감이 들만큼 Kim여사의 이야기와 똑같았다. 이쯤 돼서 포즈를 편한 자세로 바꿔 앉았다. '솰라'를 시작으로 시작된 일장연설은 '30분간' 이어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7년을 같은 레퍼토리로 한결같이 들었기에 이제는 첫마디만 들어도 몇 분짜리인지 촉이 오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로 귀는 듣는 척하기 좋은 장식용으로 아주 쓸모가 있다. 손 발 눈으로는 은근히 딴짓을 하고 있던 찰나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 눈치챈 건가’ 죄지은 동공은 일 순간 흔들렸다. 할머니의 입술은 다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휴~’ 잽싸게 귤을 내밀었다. 드디어 인터렉션 시간이 찾아왔다. 굳어있던 몸을 쭉 펴져 기지개를 피고 하품도 한번 해주었다. 다리를 탈탈 털며 곧 있을 2부를 준비했다. 할머니의 손은 두 번째 귤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때다!


“자식이 다 서울서 사나 봐요?”

“하나는 중국가 살고, 막내딸은 강원도가 있고, 아들은 거제도에 가 있다. 둘째 딸은 어디가 사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일 나가셨어요?”

“응, 용역회사 다닌다. 오늘은 비가 와서 오전 일만 하고 들어온다 카드라.”


생존수칙 하나.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러니까 가만있어보자. 자녀가 4명이고, 둘째 딸과는 연락이 닿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사실은 할머니는 현재 할아버지와 살고 계신다. ‘휴…' 이 대목에서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려줘야겠군. '다행이다. 외롭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시는구나. 그러므로... 매일 찾아오지는 않. 으. 시. 겠. 구. 나!' 결론이 희망적이었다. 다리를 꼬을 타임이었다. '후훗'


생존수칙 둘.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주도권을 가져온다. 냉큼 필수 생활 질문으로 이어갔다.


“요 앞은 가게예요?”

“예전에 그랬는데, 지금은 안 한다.”

“그럼, 시장은 어디로 다니세요?”

“버스 타고 시내로 가서 산다. 내가 술을 좋아하니까 술은 저기에서 사고.”

“술은 뭐 드세요? 소주?”

“아니. 막걸리. 사이다랑 같이 마신다.”


오!!! 막사!! 세상에나 막사(막걸리&사이다)를 드시다니 귀여운 웃음이 나왔다. 몸은 늙어도 혀는 늙지 않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기가 막히게 맛있게 먹는 법을 잘 알고 계셨다. 마을에 제일 나이 드신 분들을 현자라 칭하는 이유가 있었다. 술 제조법을 비롯해 삶을 맛있게 요리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현자가 될 수 있어도 아무나 현자가 될 수는 없다.


“할아버지가 뭐 사갈까 물어 보드라. 그래서 술 6병 사 오라 켔다.”

“술안주는 뭐로 드 시게요?”

“응, 부추전 해 먹게 오늘은 비가 와서 할아버지랑 같이 먹어야지”

“맛있겠네요.”

“좀 줄까?”


뜻밖의 질문에 반가움이 나댔다. 긍정이 담긴 고갯짓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잠시 후 직접 밭에서 따온 부추를 한 움큼 들고 오셨다. 나도 부추전이나 해 먹을까? 잠시 곳간 상태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밀가루가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에 도달했다.


‘마음을 접어야 하나. 밀가루까지 부탁을 좀 해볼까나. 흠… 무엇을 해 먹어야 맛있게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을 지경이었다. 새 친구가 생겨 반가움인지 뜻밖의 선물에 입맛이 도는지 둘 다인지 모를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포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젊은 날

가장 밝게 빛나는 오늘을 위하여


20181003_165143.jpg 산굼부리 정상에서 가장 밝은 오시(午時)






2018년 10월 4일

시골 인심은 풍성하다는 생각

육지 것에게 흔쾌히 친구가 되어준 소피 할머니 감사합니다.


젊은 날의 소피 모두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라빛 시] 그저 작은 점인 것을. 다음 페이지에 연재하였습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일상라빛에게 있습니다. Copy right ⓒ 일상라빛 all right reserved

*오디오클립에서 시즌1 이야기를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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