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모자라도 귀여운 것이 좋아
대수롭지 않은 진실을 시간이 흘러 새롭게 깨닫는 때가 있다.
내겐 피카츄의 귀여움이 그렇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TV에서 송출하는 애니메이션 만화는 당대 초딩의 핫이슈였다. <포켓몬스터>도 그중 하나다. 포켓몬 스티커를 끼워 파는 샤니 빵은 동네 슈퍼마다 동 나기 일쑤였다. 희귀한 포켓몬 스티커를 가지고 있으면 반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내성적이었으면서도 은근히 친구들의 관심을 즐기던 어린 나는 스티커 배틀에 동참했다. 빵은 500원, 내 하루 용돈이었다. 하루에 빵 하나를 사서 희귀한 스티커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확률보다 신을 의지하여 “하나님, 저에게 포켓몬 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설의 포켓몬이 나와서 내일 아침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더 많이 감사할 것 같아요. 아멘”하고 빵 봉지를 뜯기 전 매번 간절히 기도했건만, 내 스티커북에는 흔하디 흔한 피카츄만 쌓였다.
그런 추억이 있는 세대에게 모바일 게임 포켓몬GO의 등장은 혁신이었다. 현실 세계에 가상의 사물을 결합하는 증강현실(AR) 기술은 기존 게임처럼 가상의 세상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포켓몬을 마주하게 했다. 지역에 따라 다른 종류의 포켓몬이 살고 같은 종류여도 포켓몬마다 개체값과 핵심 기술에 차이가 있어 모든 포켓몬은 실제 존재하는 생명체처럼 서로 달랐다. 이런 포켓몬GO의 기술과 디테일에 수많은 사람이 호응했지만 나는 그 열광적인 반응에 딱히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에 앱을 깔긴 했으나 몇 마리를 겨우 잡았고, 그 또한 별 볼일 없는 포켓몬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게임에 흥미를 잃었다. 숱한 실패를 통해 누군가와의 경쟁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어린 마음에 꽤 아프게 배운 인생의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전설의 포켓몬을 얻으려면 기도보다는 더 많은 빵을 사먹는 게 유리하다. 전설의 포켓몬을 기다리며 헛된 희망을 품고 실망하기보다 애초에 바라지 않는 게 합리적이다.’ 빵 봉지 앞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던 10살 아이는 이제 현실적이다 못해 조금 냉소적인 어른이 되었다. 희귀한 포켓몬이 내 것이 될 거라는 소망 자체가 없으니 게임이 재미있을 리 없다.
그래도 가끔 앱을 켜서 거의 의무적으로 포켓몬을 잡았다. 해외에 사는 친구들과 유대감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포켓몬GO만큼 효율적인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 다른 시간대에 살아가는 친구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는 적당히 가볍고 좋은 대화 주제였고, 포켓스탑에서 얻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안부인사를 대신했다(친구와 매일 한 번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다. 매일 꾸준히 선물을 주고 받아 우정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포인트가 주어지고 포켓몬 교환이 수월해진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는 포켓몬GO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주변에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을 찾는 게 힘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나는 사람들이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포켓몬GO는 경쟁을 부추기거나 자랑하기 위한 게임은 아니다. 이 게임이 국내에 정식 출시되기 전 포켓몬이 깜짝 등장했던 속초로 포켓몬 원정 여행을 떠나는 열정도, 희귀한 포켓몬을 잡기 위해 집에 가는 마지막 버스에서 내렸다는 무용담도 내겐 없다. 그럼에도 남들만큼 렙업을 했고 로켓단과의 배틀에서 전설의 포켓몬도 몇 마리 뺏어냈다. 포켓몬을 잡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자타공인 똥손인 내가 이 정도니 누구라도 꾸준히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응원'과 ‘성장’의 메시지를 주는 게임이다.
게임을 하기 전 나는 ‘가상 현실'보다는 ‘실제 현실’이 내게 더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고, 꽤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어른의 모습을 한 스스로에 만족했다. 하지만 포켓몬GO를 하다보니 치기 어린 꼬맹이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어른이 된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항상 1등이 되기 위해 게임을 했고, 1등이 될 수 없다면 일찍이 포기했다. 띠부띠부 스티커의 세계에서 피카츄는 환영받지 못했다. 귀엽긴 했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포켓몬 스티커로는 주목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이해한 이 게임의 방식에 따르면 모두가 1등이 되기 위해 게임을 하는 건 아니다.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포켓몬을 만나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그냥 귀여운 피카츄를 만났을 때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적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던 친구들도 그냥 함께 노는 것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이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실망과 질투로 물든 내 어린 시절이 좀 더 행복하고 지금쯤 더 괜찮은 어른이 되었으려나.
사실 포켓몬GO에서도 피카츄는 기본 개체값이 워낙 작아 키울 만한 포켓몬은 못된다. 그렇지만 피카츄보다 귀여운 포켓몬을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귀여움’이란 인간의 본능과 연관된 감정이다. 토실토실한 얼굴, 짧은 팔다리, 서투른 몸 동작 등 우리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특징은 모두 아기의 모습과 관계한다. 인간은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다. 받는 사랑도 소중하지만, 사랑을 쏟을 대상 또한 필요로 한다. 고양이에게 지배받는 집사나 집에 홀로 있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스스로 집에 묶인 이들의 행동은 '귀여움'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갈망과 관련이 깊다. 다가가기 쉬운 부드러운 생김새에 약하고 보살펴줘야 할 존재. 그러니 피카츄가 강해진다는 것은 그 강력한 무기인 ‘귀여움'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서 지우의 피카츄는 라이츄로 진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사랑스러운 피카츄로 존재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이전보다 성장하고 결국 목표를 이루는 피카츄의 모습은 기특하고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내가 특별하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 어른이라는 단어는 곧 장래희망 란에 적힌 그리 다양하지 못한 직업과 연결되었다. 나는 고작 작은 어린아이였지만 남들보다 뛰어나야 했고 '성공'을 통해 내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시간이 흐르고보니, 어른이 된다는 건 성공보단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견디는 것에 가깝다. 나의 평범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즐거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 평범함조차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안다.
강하고 특별한 것이 자랑이 되는 세상이지만, 전세계 수많은 덕후를 양산한 <포켓몬스터> 서사의 주인공은 결국 피카츄다. 왜 지우가 그렇게 약한 피카츄를 통해 싸웠는지, 어른이 되어서야 만화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됐다. 피카츄로 가득했던 어릴 적 내 스티커북도 돌아보니 꽤 귀엽고 소중한 추억이다. 평범할 지라도 사랑스러운 존재. 작고 소중한 나의 피카츄. 이것은 아프게 인정한 진실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얻은 희망찬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