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안녕 태국, 안녕 9월

by 수수한

재즈바를 나서고 남은 일정은 단순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썽태우를 타고 치앙마이 기차역으로 가서 12시간 동안 기차로 방콕까지 달려간 후, 시암 파라곤 마켓에 들러 쇼핑을 좀 하고, 무사히 수안나품 공항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타기. 여행은 끝.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야간열차를 타고(자고) 싶어서 방콕부터 치앙마이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은 건 좋았다. 자리에서 바깥 구경을 하면서 열차식을 먹다 보면 날이 저물었고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좌석 칸을 접어 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도 뚝딱 하고 2층 침대를 만들어 줬다. 2층 베드에는 창문이 없었지만 자리는 생각보다 아늑해서 푹 잤다. 그런대로 낭만적이었다.


그렇지만 장거리 버스 외엔 교통수단이 마땅하지 않은 남미도 아니고 비행 편으로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오가는 치앙마이~방콕 구간을 기차로 되돌아올 생각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침 8시 50분 치앙마이 출발, 저녁 7시 25분 방콕 도착. 장장 10시간 반의 여정이었다. 불과 작년 일이지만 지금은 좀이 쑤셔서 못할 것 같은데... 아무튼 작년 9월의 나는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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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할 땐 분명 밝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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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할 땐 해가 다 졌다.

12시간 동안 기차 붙박이장처럼 찰싹 붙어 있었다. 책을 읽고, 즐겨 듣던 팟캐스트 <필름 클럽>을 듣다가,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고, 사진을 찍고, 잠깐 잠들었다가,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정리해도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다. 중간에 빵이며 주스, 간식이 든 도시락을 줘서 기내식을 받은 것처럼 신났다가 내다본 차창 밖은 초록색 우거진 수풀이 가득했다.


해 뜨고 탄 기차가 먼 길을 달려 수도에 도착할 즈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하루를 꼬박 달려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승객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종점인 방콕에 다다라서야 내릴 수 있었다. 며칠 만에 왔는데 그새 오랜만인 것처럼 반가웠다. 해는 다 져서 캄캄했다. 여행 내내 달고 살았던 소울푸드 팟타이를 잊지 않기 위해 팟타이 키트를 사러 시암파라곤으로 향했다.


마지막 식사로 팟타이를 먹고 팟타이 키트를 샀다. 지금은 한국에도 들어왔지만 그때는 태국에서만 판다고 유명했던 '맥도날드 콘파이'도 먹었다. 한국에 가서도 분명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태국 음식인데 다시 못 먹을 사람처럼 열심히 먹었다. 맛은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맛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P20170914_225338219_FE4E6000-CA4F-427B-A43E-12A98934F9F6.jpg 마지막 팟타이.

처음으로 혼자 나온 해외여행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찾아 다니는 성격도 아니라서 여행 카페에서 동행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고, 기회가 될 때 대화를 나누고 식사나 커피를 같이 하는 정도의 짧은 동행만 있었다.

혼자 다니는 게 무섭다거나 걱정한 적은 없지만 역시 심심하긴 했다. 좋을 때, 행복할 때 "좋다."라고 말할 수 없어서 심심했다. 혼자 속으로 '좋네.'라고 여러 번 되뇌다 언젠가부터는 나도 모르게 탄식처럼 그 말을 내뱉었다.

홀로 여행도 좋지만 다음 여행은 같이 하는 여행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내가 다시 채워졌음을 알았다.


집에 돌아와 짐을 대충 풀고 곯아떨어졌다. 밖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리고 잠깐 깨어 천장을 봤는데 멍해서 '여기가 어디지?' 싶었다. 아직 태국인 것 같았다. 아직 코끼리 바지를 입고 원석 드롭 이어링을 끼고 게스트하우스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국이었다. 서울이었다. 내 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9월은 아직 절반도 안 지나가 있었다. 비로소 9월을 즐겁게 채워나가고 싶어졌다.

DSC03118.jpg 와불의 느긋한 표정을 정말 좋아한다.




이건 '여행이 끝난 뒤'에 쓴 메모.

비우러 간 여행이었다. 돈은 비웠고(ㅋㅋ) 생각은 채우지도 비우지도 못하고 번민했다 여전히. 떠난다고 리셋이 쉬울 리 없었다. 그렇지만 다녀오니 아무렇게나 내 안에서 떠돌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일상을 복원하기. 이제는 그것을 하나씩 해나갈 자신이 생겼다.

이제 잘 안다. 열중하고 있던 무언가가 끝났을 때, 외상이 찾아왔을 때, 내게 필요한 건 전환이다. 한 국면이 끝나고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기 전, 마음을 환기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장소의 전환이다. 백 번이면 구십구 번은 먹히는 방법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나답지 않은 말을 하면서 몇 개월을 보낸 후에 갑자기 여행을 가야겠다고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을 알아본 이유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박차고 나왔지만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고 어떻게 시작할지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막막했다. 이를 빡빡 갈 때는 언제고 벌써 작아지고 있는 내가 달라질 수 있는 방법은 낯선 곳에 내던져지는 것밖엔 없었다. 예상한 대로 낯선 사람들, 낯선 풍경을 통해 생경함을 느끼면서 시들어 있던 정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 떨어져도 팟타이며 누들, 인도 커리며 잘 찾아 먹고 하루 2만 보씩 3만 보씩 두 발로 잘 걸어 다니고 얼마든지 재밌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더 이상 고민할 게 없었다.

"하면 되지. 안 되면 말고."라는 막무가내형 자신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일상을 만들고 메모를 하고 자판을 두드리며 쓰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이 여행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DSC03153.jpg 툭툭 타기를 참 좋아했던 방콕에서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