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에서 치앙마이로
고작 하루 있었던 빠이에서는 그냥 늘어져 있었다. 동행이 없으면 세월아 네월아 내 멋대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는 나다. 빠이캐니언, 온천, 메모리얼브릿지 같은 관광지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오후에 도착해 마을 중심가를 구경하고, 왠지 모르게 정말 먹고 싶었던 인도 카레를 양껏 먹고 저녁부터는 운치와 공포 사이에서 방갈로 숙소를 탐험했다.
아침에 일어나 트립어드바이저 앱을 켜서 근처에 뭐가 있나 살펴보다가 '왓매옌'이라는 곳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줍고 천천히 나갔다. 하얀색 부처상이 있는 사원이라고 했다. 가는 길은 빠이답게 비포장도로 언덕길이었다. 구비구비 시골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다 바이크를 타고 내 옆을 지나쳤다. 운전면허가 없다는 게 조금 서러웠지만 어디서든 잘 걷는 튼튼한 내 다리가 행여 삐질라 마음을 다잡았다.
20분에서 30분 정도 정처 없이 걸었더니 뭐가 있긴 했다. 찾아봤던 그 사원이었다.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서 주위가 산만했다.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다가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불교의 나라에 갔더니 발에 채이는 게 사원이라 다른 나라에서보다 감흥이 덜했다. 교회나 성당이었다면 한두 번쯤 더 찾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길을 되돌아오다가 목이 말라서 눈에 띄는 카페에 들렀다. 말할 때 활짝 펼쳐지는 입꼬리가 시원한 브라질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장기 여행자였다. 몇 개월에 걸쳐 아시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내 열흘 태국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 후 언젠가 꼭 브라질에 갈 거라고 덧붙이곤 그녀가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서로의 '굿 럭'을 빌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에 들러 전날 맡긴 빨래를 찾았다. 뽀송뽀송한 여름옷을 만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따사로운 햇살도(사실 땀은 비오듯 흘렀지만), 내 손 안의 빨래도, 다시 치앙마이로 가는 것도, 만 하루 빠이 여행의 아쉬움도, 모조리 좋았다.
마지막으로 방갈로에 돌아와 짐을 꾸리고 아침을 먹었다. 그림 같은 초록, 파랑, 하양 자연 앞에서 책을 읽으면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슬그머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배낭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조용히 태국의 수많은 모든 사원에 대고 빌었다. '저 고양이가 제 발로 가방 속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 고앵의 사진만 실컷 찍었다.
미니밴을 타고 다시 762개의 고개를 넘어왔다. 냄새가 유난히 많이 나는 차였다. 덜컹덜컹 달리는 차에서 4시간 동안 잠도 못 자고 멀미를 했다. 치앙마이에 돌아와서는 빠이 가기 전에 내리 3일을 묵었던 한인 게스트하우스 말고 다른 곳에 묵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했고 함께 있으면 왁자지껄 즐거웠지만 조용한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날은 빠이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치앙마이에서의 마지막 '밤'이기도 했다. 특별한 밤을 재즈바 '노스게이트'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 밤, 이 음악, 이 순간은 정말 오래 기억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짐대로 나는 아직 치앙마이를 생각할 때 노스게이트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재즈를 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것은 몇 번 안 된다.
하지만 볼 때마다 손 닿을 거리에서 제멋대로 음을 늘였다 줄였다 목소리를 휘었다 꼬았다, 변주하며 노래하고 연주했던 노스게이트의 음악가들이 떠오른다. 어쩜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지.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을 나처럼 순간의 마법에 금방 빠져드는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날 밤 재즈의 마법은 다시 치앙마이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데 충분했다. 언젠가 그곳 어느 자리에서 비어라오를 홀짝이는 날이 다시 찾아올 것 같다. 100%의 확신으로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