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구름의 고향, 빠이

동경과 두려움을 품고 지샌 하룻밤

by 수수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보다 구름 가득한 하늘이 좋았다. 하늘에 진 무늬는 같은 이름이라도 고개를 들 때마다 다른 모양이었고 하염없이 바라만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라도 좋았다.


우산이 없는 날 먹구름에서 비가 대차게 쏟아져도 좋았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맞으면 그만이고 그런 사소한 일탈이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에 변함 없이 동의하니까.


762개의 고개를 3시간 30분 동안 넘어간다. 한 번 왼쪽으로 가면 한 번은 오른쪽으로 간다. 빠이로 가는 길은 오락가락하는 여행자의 마음을 닮았다.

'이왕 닦는 거 일자로 뚫지.' 하는 생각도 잠깐이다. 금세 지그재그 놀이에 적응해 책을 읽다가 뒷자리 히피들의 대화를 훔쳐 듣다가 이어폰을 낀 채로 잠이 든다. 세 시간이 흐른다.

풀어헤친 머리, 편안한 반바지에 전날 시장에서 산 짝퉁 폴로 반팔 티셔츠를 걸치고 내렸더니 나도 히피(혹은 그냥 거지)가 된 듯.

오후 2시, 태양은 작열하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가득하다.

숙소를 찾아가는데 왼쪽도 오른쪽도 위도 구름이 가득하다. 짧은 길을 가면서 몇 번이나 멈춘다. 그 덕에 나는 그 길을 꽤 멀다고 기억한다.

빠이 중심가

빠이에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여러 구역이 있겠지만 버스 터미널 근처를 중심으로 시내가 발달해 있다. 불과 몇 년 혹은 십수 년 전, 입소문을 타고 서양 여행자들이 이 작은 지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서 유럽 휴양지의 느낌을 물씬 풍기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보물을 발굴하고 단시간에 바꿔놓았을까. 빠이로 오는 미니밴을 함께 탄 히피들과 비슷한 차림새를 한 여행자(겸 히피)들이 가득하다. 그들을 위한 영어 간판, 그들 입맛의 음식들이 즐비해 때론 오지랖 넓은 한숨이 나온다. 마치 내 고향 제주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빠이 시내에서 숙소 가는 길

하루짜리 방갈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다시 산과 구름과 들과 강을 만난다. 마을은 변해도 이 자연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원한다. 부디.


그날 밤, 천둥이 오래 치다가 한 번씩 번개가 땅에 내리 꽂힌다. 천둥소리마다 빠짐 없이 화들짝 놀란다. 문을 열면 농부들이 농작물을 수확하는 들판이 넓게 펼쳐진 방갈로는 운치 있지만 혼자서는 조금 무섭다.


'문을 열고 자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들판을 볼 수 있겠지.' 하고 낭만에 빠져 문을 활짝 열어뒀던 나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허술한 잠금장치로 된 문과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내가 보인다.

잠잠히 생각한다. '어디 하루 이틀 도시에 살았어야지.'

방갈로 숙소, 문을 열면 들판이 보였다.

바깥 자연을 탐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모순된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빠이에서 확신했던 한 가지는 내가 이 풍경을 그리워할 거란 것.

태국에서 머물렀던 세 지역 중 가장 짧은 시간 지냈지만 가장 마음이 편했던 빠이는 구름의 고향처럼 흰 구름, 먹구름, 양떼구름이 아름다웠고 할 것도 볼 것도 없어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철퍼덕 앉아서, 때로는 뻣뻣이 서서 구름을 바라보는 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