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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Apr 26. 2019

05 : 여행의 완성

잔잔한 듯 뜨겁게, 타이베이

혼자 하는 여행도 즐겁지만, 함께 하면 여행의 이야기가 풍부해진다. 더 많은 음을 써서 음악을 만드는 것 같고, 더 다양한 재료를 써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타이베이에서도 그랬다. 

우연히 만난 친구와 밤이 늦도록 대화를 나눴다. 여행에 대해, 일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산 적 없지만 그리 다르지 않은 어떤 삶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마지막 밤을 시작했다. 

타이베이 마지막 숙소, i'm inn taipei.

유천을 만난 건 게스트하우스에서였다. 

단수이에서 돌아와 체크인을 하고 도미토리 방에 들어갔는데 이미 한 사람이 와 있었다. 나에게 “니하오.” 하고 인사해서 “하이.”라고 답했다. 바쁘게 짐 정리를 하고 위층 침대로 올라가길래 피곤한가 싶어서 조용히 짐을 정리했다. 씻고 나왔더니 금방 심심해졌다. 


마지막 날이니까 밖에라도 나갈까 고민했는데 자전거를 오래 탄 탓에 기운이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위층 친구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조용히 편의점 망고 도시락을 권했다. 만국 공통 먹을 걸 주면 마음이 열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대로였다. 대화의 물꼬가 터지자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유천은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눈에 띄게 좋아했다. 중국인인 줄 알아서 그렇게 쌀쌀맞았구나 싶었다. 

중국에 대한 감정을 묻자, 중국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식민 역사 때문에 아직도 반일 감정이 깊다고 하자 “아직도?”라고 되물었다. 


오기 전에 읽은 타이베이에 관한 책에서 말한 것처럼 대만 역시 일본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지만, 체제가 잔악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감정이 긍정적이라 했다. 나는 유천에게 역시 참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밤의 물건들.

유천은 나보다 4살인가 많았고 대만의 남쪽 지방 가오슝에서 왔다고 했다. 101타워에서 열린 문구 박람회를 구경하러 타이베이에 들렀고 내일 가오슝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타이베이에서 일하다가 귀향해 가오슝의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가오슝은 꼭 내 고향 제주 같았다. 대만 남쪽의 따뜻한 항구 도시고, 타이베이와 비교하면 좀 지루하지만 평화로운 곳. 유천은 한국어도 조금 배운 적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한국어 이름도 있는데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며 자신의 한국어 이름을 써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물론이었다. 


귀여운 편지지를 가져와서 천천히 한국 이름의 발음을 영어로 썼다. 황유천이었다. 나는 믹키유천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겠다고 해서 구글에 사진을 검색해 보여주니 엄청나게 웃었다. 본 것 같다고 했다. 유명한 이름이냐고 묻길래 요즘은 좀 시끄러운 이름이지만 한때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고 말했다. 박유천의 근황은 말하지 않았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놀고 있다고 하니 아주 좋을 때라고 했다. 수십 번 들었지만 타이베이 한복판에서 또 듣자니 웃음이 났다. 세계 어디에서나 퇴사자는 부러움의 대상이구나. 유천은 일이 지루해서 여행이 일을 계속하는 파워가 되었다 말했다. 

그 대목에서 고개를 수십 번은 끄덕인 것 같다. "맞아, 맞아. 정말 그래."


그는 다음 여행에 대해서도 말해줬다. 이번 가을엔 후쿠오카에 갈 거라고 했고, 언젠가 한국에 다시 오면 연락해도 되냐고 했다. 당연하다고 했다. 아직 계획도 돈도 없던 나는 그의 여행 계획들이 부러워서 미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다른 메이트들이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일기에 쓰고 잤다.

아침밥을 파는 가게. 그리고 또우장 한 컵.

아침에 씻고 나갈 때는 유천과 함께했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가 중국어로 뭔가를 일러주려고 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유천이 나서서 도와줬다. 두 사람은 아주 열성적으로 대화했다. 밥 이야긴가 했는데 역시 그랬다. 대만식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가게를 말해준 것이었다. 

스태프 씨는 게하 바로 근처에 유명한 노점이 있다고 했다. 유천이 앞장서서 가게를 찾아갔는데 아쉽게도 가게문은 닫혀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게 슬퍼했더니 슈앙리엔 역 근처에도 다른 가게가 있을 거라고 나를 북돋아줬다. 천천히 걸어가며 아무 얘기나 했다. 금세 가까워진 거 같았다. 


슈앙리엔역에 도착하니 정말 가게가 하나 있었다. 대만식 아침밥은 또우장(두유라기보단 콩국물), 딴삥(전병 안에 계란 등을 넣은 음식), 요우띠아오(튀긴 밀가루 빵) 등이 있고 길가의 노점, 김밥천국 같은 가게에서 판매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또우장이 궁금해서 또우장 한 잔과 팥앙금이 든 일반적인 빵을 하나 샀다. 아쉽게도 딴삥이나 요우띠아오는 없었다. 맛은 두유가 아니라 두부를 간 맛이었다. 유천이 어떠냐고 물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었다. 함께 사진을 몇 장 찍고 꼭 보내주겠다고 이메일을 교환했다. 잘 살고 행복하고, 건강하라고 서로 덕담을 나눴다. 안녕 유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두 시간쯤 애매하게 시간이 떠서 지하상가를 구경했다. 운 좋게도 중산역부터 타이베이역까지 2~3개 역이 을지로 쇼핑타운처럼 기다란 지하상가였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다 보니 세련되고 멋진 서점이 있어서 절로 발길을 멈췄다. 청핀서점이었다(사실 한국에 와서 검색해보고 알았다).

청핀서점.
아침부터 책 읽는 타이베이 사람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책 광고(?).

청핀서점(성품서점)은 타이베이의 교보문고라고 불리는 유명 서점 브랜드다. 청핀 기업은 1989년부터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99년도에 서점을 24시간 개방하면서부터 유명세를 얻었다고 한다(본점 격인 둔화점만). 주말엔 낮보다 밤에 손님이 더 많다고 한다. 진작 알았더라면 타이베이 올빼미 독서족이 되었을 텐데. 다음번을 기약했다.


이 기업은 책과 관련해 문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24시간 서점도 그렇고, 청핀호텔 사업을 시작하며 책을 벽면 가득 깔아놓은 것도 그렇고. 현재는 서점에서 문구, 기념품, 음반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청핀생활'과 카페, 티 하우스도 운영하며 범위를 넓히고 있단다. 일본의 쓰타야 서점이 생각났다. 


이만한 확장이 가능한 건 독서 인구가 뒷받침되기 때문일 거라 짐작했는데, 찾아보니 역시 인구 대비 신간 도서 출간율이 영국에 이어 2위란다. 한국의 절반 인구로 비슷한 분량의 책을 발간하는 것이다. 대만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꼭 다시 올 것!


둔화점이 가장 유명하지만, 내가 갔던 중산역 지하상가점을 비롯해 지점이 많다. 책을 구경하다가 어차피 중국어 원서나 영어 원서는 읽지 않을 게 뻔하니 눈을 돌려서 마지막 여비를 털기로 했다. 문구류로. 

귀여운 문구 용품들을 보자 친구들 생각이 났다. 여유 없이 떠나온 여행이라 좋은 선물을 줄 순 없어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귀여운 클리어 파일을 몇 개 골랐다. ‘A에겐 코끼리를, B에겐 여우를 줘야지’ 고심하면서. 

책 외에도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청핀생활(誠品生活). 

청핀서점을 나와 지하철을 탔더니 공항엔 금방 도착했다.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처음 송산 공항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지하철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던 때가 생각났다. 단 며칠 만에 새 도시가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재밌었다.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막막하게 느껴졌다.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산담….' 하는 고민을 안고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밥알을 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식사 중이었다). 밥알을 아주 꼭꼭 씹어 먹으면서, 이 밥알이 금세 소화가 되는 것처럼 한국 생활도 내 더운 7월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되뇌었다. 


수속을 밟고 게이트까지 갔더니 이미 한국에 도착한 듯했다. 한국말 천지였다. 비행기 안에서 사진을 정리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자다 일어나서 하늘을 구경하고…. 어느새 김포에 떨어졌다. 짐을 찾고 유심을 바꿔 끼우고 지하철에서 어깨를 치고 가면서 사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더니 한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룸메이트와 통화를 하고, 구의역에 도착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집으로 돌아갔다. 거짓말처럼 또 하나의 여행이 끝났고 다음을 기약할 때였다. 

송산공항 라운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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