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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ul 31. 2021

'균형'잡힌 쾌락주의자를 꿈꿉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에피쿠로스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살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지 않으면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 에피쿠로스 


최근 알쓸신잡을 다시 보면서, 김영하 작가님의 문장에 심장이 반응했다. '균형' 잡힌 쾌락주의자. 그가 에피쿠로스 학파를 두고 출연진들과 방송에서 나눴던 대화였다. 에피큐리즘이 추구했던 쾌락은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이 주장했던 '쾌락'은 지속 가능하며 정적인 쾌락이었고, 그리고 이를 통해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스스로 '행복'의 본질, 그리고 조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곤 한다. 내가 정의하는 행복의 모습은 어떤 걸까,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할 때 행복한가. 앞으로 나는 이러한 모습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이런 부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앞서 언급한 '행복'이라는 형태가 에피큐리즘에서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의 사상을 복기해보는 시간을 보냈다. 마치, 잊고 지냈던 친한 친구 한 명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읽었던 교과서 한편에 항상 그들이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들의 생각에 무릎을 탁- 치게 됐던 걸까! 



이들이 이야기하는 쾌락과, 내가 정의하는 행복의 결은 상당히 유사했다. 에피큐리즘이 탄생한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고, 이들이 정의하는 '행복'은 평화롭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즉, 적극적으로 어떤 쾌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고통, 근심을 제거한 평온한 상태를 추구하는 태도라는 것. 흔히 '쾌락주의'라고 하면, 육체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삶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지만 에피큐리즘은 이와 엄연히 다르다. 순간적, 육체적인 쾌락보다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따른다. 이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스탠스는 '아타락시아'인데, 의미 역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쾌락주의자가 아닌 '균형 잡힌'이라는 워딩을 선택한 이유는, 어찌 됐든 쾌락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피큐리즘은 '당장은 불행을 갖고 오는 결정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후에 얻을 쾌락을 위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많다'라고 이야기했다. 사람이 매번 행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도 고려하며 근시안적인 쾌락에 대해선 미련 없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균형 있는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일종의 의지를 담았다.  



스스로 '아타락시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삶이 윤택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타락시아에 다다를 때,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래 왔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다거나,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서거나,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이를 행동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은 '평정심'에서 비로소 나올 수 있다. 신체적, 정신적 core를 힘 있게 유지하고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core를 잡을 수 있는 힘은 부와 명예와 같은 외부적 요인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거창한 요인들보다는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재미와 행복에서 발현된다고 믿는다. 그 가치관이 정말 비슷한, 멋있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다. 앞으로 살면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에피쿠로스'라는 단어를 많이 선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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