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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Dec 29. 2020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리뷰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장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 날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각기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나온다. 극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부분은 주인공인 장재열(조인성)과 지해수(공효진)의 정신증이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갖고 있고 그것을 거리낌없이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줄거리 소개에는 스포가 있음>>
 
장재열(조인성)은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와 형의 폭력에 늘 공포에 떨며 지냈다. 작고 약했던 그는 의붓아버지의 구타를 피하려다가 공중변소의 똥통에 들어가, 먼저 그곳에 숨어있던 어머니와 함께 폭력을 피하기도 한다. 이후 장재열(조인성)은 화장실에서만 잠을 잘 수 있는 강박증과 결벽증에 걸리고, 어머니 또한 문을 닫으면 잠을 못 자는 강박증과 결벽증에 걸린다.
 
어느 날 어린 장재열(조인성)은 계속되는 의붓아버지의 폭력에 발끈해 칼을 들었다가, 의붓아버지가 넘어지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얕은 자상을 내고 정신을 잃는다. 장재열의 형이 그를 업고 나간 사이 어머니가 불을 질러 의붓아버지를 질식사시키지만, 그의 어머니는 해리성 기억상실증으로 본인이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장재열의 형 또한 어머니가 불을 지르는 장면을 보지 못해 의붓아버지를 장재열(조인성)이 죽였다고 믿게 되는데, 거울을 통해 현장을 목격한 어린 장재열만이 진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처벌을 막기 위해 장재열(조인성)은 법정에서 형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위증을 하고, 절도 등의 전과가 있었던 비행청소년 형은 14년형을 선고 받아 장기 복역을 하게 된다. 스트레스로 인해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형은 장재열에게 복수하겠다며 포크로 어깨를 찌르는 등 계속해서 상해를 입힌다.
 
장재열(조인성)은 어른이 되어 성공하고 부유한 작가가 되었지만 형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강우(도경수)’라는 환시를 만들어 내, 스스로 자살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무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출처: 괜찮아 사랑이야 네이버 포스터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장재열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인 지해수(공효진)다. 지해수(공효진)는 고등학생 시절 엄마가 아픈 아버지를 두고 ‘김 사장’이라는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30대에 이르도록 남자와 키스조차 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16화에 걸쳐 지해수(공효진)와 장재열(조인성)은 서로의 강박과 예민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고 감싸주며, 동시에 스스로를 보살피게 된다.


둘은 사랑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사랑을 믿지 못하고 늘 날이 서 있는 지해수(공효진)의 말문를 막히게 한 대사가 와닿아 공유하고 싶다. 모든 경우에 적용되진 않겠지만 아니지만 그래도.
 

 
“너도 사랑 지상주의니? 사랑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거라고?”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사랑에 상처가 어디 있고 손해가 어디 있냐. 사랑은 추억이나 축복, 둘 중에 하나야.”


 줄거리만 본다면 드라마의 내용이 너무 깊고 어두울 수 있지만, 내용과 반대되는 유쾌한 ost와 여름 느낌이 물씬 나는 연출로 인해 우울함이 전이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정신분열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장재열(조인성)이 3년만에 한강우(도경수)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거의 자신인 한강우를 보듬어주며 따스한 작별인사를 하는 부분은 오히려 안도감과 함께 마음에 온기를 전해준다.


늘 피투성이 맨발로 다니던 한강우(도경수)


 장재열(조인성)의 환시인 한강우(도경수)는 늘 의붓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느라 피투성이 맨발인데, 겉은 멋진 어른이지만 내면은 아직 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장재열의 내면을 보여준다. 정도의 차이가 크겠지만 아마 누구나 우리 속에 이런 약한 아이가 한 명쯤 있지 않을까.


어렸고, 약했고, 몰라서 아팠던 어린 시절의 나. 하지만 그 아이가 자꾸 나타나 마음이 쓰이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꽉 안아주며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는 것 뿐이다. 한강우(도경수)의 피투성이 발을 닦고 씻겨준 뒤 튼튼한 신발을 신겨 떠나보낸 장재열(조인성)처럼.



 
네이버에 ‘괜찮아 사랑이야’를 검색하면 ‘작은 외상에는 병적으로 집착하며 호들갑을 떨지만 마음의 병은 짊어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라는 소개가 나온다. 앞서 소개한 이성복 시인의 ‘그 날’ 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병들었다면 아파해야하고, 괜찮을 일이 아니라면 울고 소리쳐야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남에 대한 폭력이나 폭언, 혹은 스스로의 자해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 상처가 곪아 터지기 전에.


“암에 걸린 환자나 장애인들은 동정이나 위로를 받는데 정신증 환자들은 사람들이 죄다 이상하게 봐 꼭 못 볼 벌레 보듯이. 큰 스트레스 연타 3방이면 너나 할 거 없이 다 걸릴 수 있는 게 정신증인데 지들은 죽어도 안 걸릴 것처럼. “

 

어떤 사람들은 멘탈이 약해서 걸리는 게 정신증이라며 기피하고 터부시하기도 하지만, 병이 병인 줄을 모르고 상처를 대충 옷으로 가려놓는 사람들보다는 맘껏 소리내어 아파하는 게 오히려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방법 아닐까. 아프지 않은 게 가장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아파해야지.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인물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주면서 아픔을 치유해나간다.

상처는 높고 단단한 벽과 같아서, 그 벽을 올려다볼 때면 절대로 넘지 못할 것만 같다. 때로는 어둠 속에서 코앞까지 다가와 숨을 막히게도 하겠지. 그러나 인물들은 16화에 걸쳐 서서히, 그리고 동시에 어떤 변화의 한 순간을 통해 벽의 높이를 낮춘다.


그리고 나아질 수 있다며, 이 어둠이 사라진 뒤 벽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준다. 고통 없는 삶이란 없겠지만 그것을 이겨낼 힘도 나에게 있을 것이란 믿음도 함께.


/


나에 대한 사랑과 남에게서 받는 사랑이 쌓이면 언젠가 불을 탁 켤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겠지.


너 많이 힘들었구나, 이젠 내가 있어, 라는 말을 나에게도, 남에게도 해 주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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