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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Aug 08. 2024

보이지 않는 곳의 사람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중심으로

  

  최근 사실혼 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피부양자 등록 배제가 헌법상 평등 원칙을 위반했다는 다수 의견에 따른 판결이다.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 가족의 범주가 넓어지는 것은 기념할만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생각되는 소수자들은 조르조 아감벤이 로마법에서 차용한 개념인 ‘호모사케르’로 설명될 수 있다. 호모사케르는 조직에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배제된 존재를 뜻한다. 그들은 ‘예외적 상태에 있는 예외적인 존재’로, 공동체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분리되고 배제되는 ‘예외화’ 상태에 빠진다.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생명을 양분해서 바라보면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삶/생명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두 가지 구분되는 용어로 말했다. 조에(zōê)는 모든 생명체(동물, 인간 혹은 신)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라면, 비오스(bíos)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뜻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산다는 것과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상반된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나중에 얘기할 아렌트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치 있는 정치적 삶은 비오스(bíos)다. 단순한 자연 생명으로서 조에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폴리스/정치가 이뤄지는 공적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생산을 위한 삶으로서 오이코스/생존·번식을 위한 재생산 및 경제·노동 활동이 이뤄지는 가정의 사적 영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p.33-34)


 아감벤은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부에 있는' 상황을 '포함적 배제', '벌거벗은 삶'이라고 일컫는다.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에 배제되도록 함으로써 폴리스에 거주하는 예외적인 존재들이다. 이들은 비오스가 아닌 조에로서 인간의 단순한 자연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호모사케르다. 이들은 박해해도 죄가 되지 않고 가치 있는 일(신성한 의식)에 결코 쓰일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며, 그들의 어떤 저항도 무가치하며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주권의 역설 측면에서


주권자의 권위는 법을 창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같은 비상권한은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예외상태의 결정에 있다. - 칼 슈미트


아감벤이 슈미트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감벤은 슈미트의 예외 개념에서 주권의 본질 개념이 확연히 드러난다고 본다. 예외가 정상적인 질서와 단순한 이항 대립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 규범의 효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예외상태는 한편으로 규범이 효력을 갖지만 적용되지 않고(‘힘’을 갖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법률적 가치를 갖지 않는 결의가 법률의 ‘힘’을 획득하는 하나의 ‘법률 상태’를 규정하고 있다. (79쪽)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만이 예외가 아니라, 주권의 구조 자체를 예외 상태로 본다. 법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지양의 형식으로써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예외, 배제는 경계지음을 통해 마치 규칙과 무관하게 느껴지게 하지만, 배제되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무관해질 수 없다. '오히려 규칙의 정지라는 형태로 규칙에 결합해 있으며' 이는 규칙이 예외를 창출하며, 그것을 통해서만 그 자신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구별을 짓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쉽다. 선을 그어 구별을 지을 때, 선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규칙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배제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만 그 배제의 대상이 존재함으로써 적용의 상태가 지속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외려 예외 상태가 부재한다면 법의 효력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아감벤은 위의 벌거벗은 생명을 서양 정치의 전통의 문제에서 찾는다. 그는 고대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 나치 강제수용소 수감자, 억류된 난민, 수감자 등 권리를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의 예시를 든다. 

호모 사케르가 화두에 오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제가 난민 문제인 것 같은데, 필자는 '예외 상태에 있는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을 좀 더 지엽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아직 난민 주제는 다루어져야 할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외면되고 있다. 그러나 난민 뿐 아니라, 더 폭넓은 범주의 사람들이 언제든 관점에 따라 호모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난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상'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모두 예외 상태에 놓인다.  성소수자, 장애인, 유아나 노인 등, 이러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의미와 가치가 사라진 공간에서 각자 실존적 문제를 겪게 된다. 호모사케르로 전락하는 것의 문제점은 학력이나 능력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여러가지 문제와 결부되어 자아의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회,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도 보호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기준으로 구별을 짓느냐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정상과 예외는 달라진다. 나는 언제나 경계의 안 쪽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호모 사케르를 멀리 있는 거대한 개념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하는 사회를 다시 한번 축하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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