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수경 Aug 09. 2024

내 안에서 시작되는 시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중심으로


오늘날 인간의 개별성과 자유는 어느 때보다 중시되고 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중앙집권적으로 집단이 발전하고, 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시대는 저물었다. 그러나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법과 제도가 역으로 인간을 자유롭지 않게 한다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근거를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찾았다. 


푸코는 벤담이 고안한 감옥 구조인 ‘판옵티콘’이 감옥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고 말한다. 판옵티콘은 죄수가 보이지 않는 공간에 있는 감시자, 다른 죄수자들에 의해 감시될 수 있는 구조인데, 이 원리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게 된다. 감시자가 눈을 떼더라도, 즉 감시 작용이 중단되더라도 그 효과는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전처럼 군주권력이 가시적으로 사람들에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규율권력이 개인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통제하는 것을 지적한다. 개인의 특성을 기록하고 파편화해 감시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구조적으로 강압의 기제가 될 뿐 아니라, 나아가 생명의 내면에 자리잡아 개인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규율의 대상이 아니었던 신체를 자료의 대상으로 편입한 것의 역사는 중세 서양에서 전염병을 관리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증상, 이동경로 등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습성이 낱낱이 기록되고, 하나의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전 세대에서는 전염병 환자에게나 적용되었던 위계질서적 관리가 이제는 사회 전반부로 퍼졌다는 것에 있다. 교육받은 대로의 윤리를 내면화한 인간은, 스스로가 규율에 맞는지를 파악하고 교정한다.  


판옵티콘. 출처 구글



 판옵티콘을 통한 권력의 행사 매커니즘은 조지 오웰의 ‘1984’를 통해 더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다. 소설 속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그 이미지가 드러날 뿐, 실체를 볼 수는 없는 권력관계의 표상이다. 사람들 간의 대화는 물론 혼잣말이나 잠꼬대까지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빅브라더의 감시 아래, 피지배인 대상인 윈스턴과 오세아니아의 시민들은 권력관계에 따라 변화를 당하는 수동적인 타자의 자리에 놓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조차 간파할 수 있는 감시의 주체인 빅브라더는 물리적인 쇠사슬이 아닌 관념의 사슬로 당원들(시민들)을 구속하고, 당원들은 그 사슬의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는 동시에 그들이 속한 사회를 스스로의 합의와 동의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는다. 텔레스크린이 모든 공간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또 시민들이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규율에 길들여지는 것은 판옵티콘의 전형이며, 벤담이 기획한 감옥의 설계가 정확히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규율 권력


죄수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감시사회는 개인의 신체를 길들인다는 점에서 규율사회이기도 하다. 규율에 의해 개인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통제하는 사회의 원리는 판옵티콘에서 온다. 푸코가 특히 강조한 것은 신체에 대한 통제인데, 규율사회는 개인의 신체를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취급하지 않고 동작, 태도 등으로 분리해 신체를 분할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 통제는 신체의 규율화를 통해 강화되고, 동시에 규율에 의해 가능하다. 

규율이 내면화되는 과정 중 핵심적인 요소는 시험이다. 시험은 권력이 행사되는 형태 와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결해준다. 우선, 시험은 권력 행사에 있어 가시성의 경제를 역전시킨다. 전통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는 자기를 과시하며 스스로를 드러냈지만, 근대에 이르러 역전된 관계 속에서 시험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시험의 결과를 통해 대상을 객체화의 구조 속에서 포착할 수 있게 되고, 개인을 자료의 영역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 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의 신체와 생활 차원의 기록을 남겨놓는 것은 개인을 기록망 속에 두어 기록부를 적시적소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을 권력관계의 내부로 끌어들인 형식화를 뜻한다. 


생체권력


생명관리 권력은 ‘생물학적 요소를 정치, 정치적 전략, 권력의 일반 전략 내부로 끌어들이는 매커니즘의 총체’로 정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감시와 교정의 작동 방식에 의해 생명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Bio- politics, 즉 생명정치라는 용어는 이론적으로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된다. Bio를 생물학, 즉 biology의 의미로 이해하는 생물학적 생명정치와, 그리스어의 사회적 존재를 뜻하는 bios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향이 있다. 푸코는 전자, 즉 생명정치를 생물학과 정치의 연결로 이해하는 전자에 해당한다. 근대에는 생명정치가 정치적으로 해석된 생물학, 즉 생물학적 지식이 기존의 지배와 권력에 이용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푸코는 이와 다른 관점으로 생물학을 생명정치와 결합했는데, 생물학이 단순히 사회적 권력구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 되었다기보다, 생물학적 지식의 발전이 권력의 본질과 방식의 변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는 생물학과 의학의 발달과정이 권력이 주권권력에서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으로 변이해 나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파악한다. 


내면화된 윤리


 사회의 규범(norme)이란 타인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시민이 지속적으로 의식하도록 만드는 장치이고, 개인의 윤리란 타인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내재화한 결과이다. 결국 개인의 윤리란 타인의 시선을 자발적으로 쉼없이 마음속에서 의식하는 것이므로, 결코 사회의 규범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없다. 내면화된 규범은 더 이상 국가나 사회나 다른 시민들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지켜진다. 

내면화는 보편적으로 개인의 사고 및 감정, 행동 등이 여러 가지의 사회적 영향을 받 아 내부로 흡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외부 작 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이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시 도에 의식적,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푸코가 지적한 부분이 바로 이 사회 규범이 내면의 윤리로 자리잡는 과정이다. 나 스스로가 항시적으로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일인 이역을 수행해 일상적인 자기검열을 일삼게 하 기 때문이다. 


규범이 내면화되어 개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사례는 탈북 주민이다. 북한 주민이 그 체계를 혐오해 남한으로 탈출해와서도 그 지도자에 대한 숭배 의식이 사라지 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북한 주민들을 체제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주조하려 는 정권 차원의 노력은 그 주민의 의식구조를 주체사상 학습과 사상 통제, 조직생활과 같은 물리적 속박으로 통제하려는 프로그램으로 나타났고, 세뇌된 주민들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 개인은 사상의식의 기제가 없다면 그 사회구조에 적응할 수 있는 인성이나 가치체계를 형성할 수 없다. 사상의식은 다른 공동체 생활에서 아프리오리(a priori)의 역 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주체사상의 내면화가 북한 주민들의 행동을 외부에서 통제하는 기제를 넘어, 개인의 자아정체감과 정서에 하나의 의식구조로 자리잡 는 것이다. 즉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의식 속에 깊이 스며 들어 있는 규범, 개인의 윤리로 작동한다.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한 사회에서 적응해 살아나간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규칙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만 가끔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시망에 갇혀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게 꼭 규칙이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학습한 윤리나 시선, 규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며 글을 마친다. 































이전 02화 보이지 않는 곳의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