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6
치즈는 마당 의자 위에 모로 누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가와서 몸을 부볐던 아까와는 달리 귀 한쪽을 쫑긋하며 먀, 소리를 낼 뿐, 움직일 마음이 없어보였다. 막상 태형의 공간으로 다시 들어오니 걷잡을 수 없는 떨림과 함께 갖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나를 공격해왔다. 이번에 제대로 거절당하면 어떡할래, 쪽팔려서 샵도 못나가게 될 지도 몰라, 눈물 나는 거 아니야?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스콜처럼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생각의 폭우에 흠뻑 젖은 뒤였다. 재희 언니와 이야기하면서 느꼈던,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과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감각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뒤였다.
애초에 잠깐의 여행으로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나. 캄캄한 태형의 집 계단은 마치 고립무원의 사막처럼 느껴졌다. 베두인 카페에서 분명 태형은 내게 감정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팔 년의 연애를 극복하고 나에게 올 수 있을까.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뚝 멈추어 서서 양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몸을 쭉쭉 뻗고 있는 치즈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후회하지 않을만한 결정이라는 건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문 열어줘.”
문을 두드리기가 무섭게 철제문이 열렸다. 아까와는 다른 옷을 입은 태형이 서 있었다. 요란한 프린팅이 있는 까만 티셔츠에, 알록달록한 바지는 내 것과 비슷한 이집트 시장 표 냉장고 바지였다.
“어떻게 이렇게 문을 빨리 열었어?”
“나가려던 참이야. 왜 답장을 안 해?”
잘 도착했냐는 말에 답장을 하지 않은 게 그제서야 떠올랐다. 미안. 한다는 게 까먹었어.
“셔츠 돌려주러 온 거야? 나중에 주면 되지.”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일단 들어와.”
부엌에는 팔라펠이며 걸레빵의 흔적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언제 다 치웠대, 괜히 너스레를 떨어봤지만 심장이 쿵쾅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몇 십분 전까지 앉아있었던 의자로 다시 걸음 하는 기분이 묘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비장하게 들어와.”
표정에서 다 티가 났나보다. 비장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떤 말로 어떻게 말해야 논리정연하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마른 침을 삼키는 태형도 긴장한 티가 났다. 맞은편 의자를 빼 걸터앉은 태형이 턱을 괴고 눈빛으로 말했다. 뭔데, 말해봐.
“계속 이렇게 저렇게 말하긴 했는데, 똑바로 전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넘어서 목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한 느낌이 정수리부터 손끝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왠지 이대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좋아해.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알아두라고.”
태형은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나 원래 일정대로라면 곧 카이로로 떠나. 가서 피라미드도 보고 낙타도 타려고 했는데, 그냥 여기 더 있으려고. 너랑 더 있고 싶어서. 만약 한국 가서 못 본다고 생각 하면 기분이 이상해. 안 가고 싶어.”
갑작스레 쏟아지는 말의 폭탄들을 태형은 어떤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두렵다고 했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거 아니야. 나랑 새로 해보자. 그게 어떤 식이든. 알려줄 순 없어도 곁에 있어줄게.”
“내가 그냥 가라고 하면?”
“네가 싫다고 하면 나야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제대로 말하고 싶었어. 난 할 수 있는 데까지 네 옆에 남고 싶어. 그게 다야.”
고백이라는 단어가 웃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아해, 나도 좋아해. 사람들이 희망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잘 짜여진 각본 같다는 생각 했었다. 먼저 마음을 표현하고 다가선 적이 없을뿐더러, 누군가 다가와도 의심하고 경계하기에 바빴다.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의 양태는 대개 비슷했다. 주위를 맴돌며 약간의 호감이 있는 걸 확인하면, 머뭇거리는 내게 말했다. 잘 모르겠으면 알려줄게.
“지금 당장 너도 나 좋아한다는 말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같이 한국 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합에 와서 더할 나위 없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오전 스쿠버 후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둘러 앉아 코샤리를 든든히 먹었을 때였다. 슈웹스까지 절반을 비우고 낡은 소파에 몸을 뉘였을 때,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었다. 배는 불렀고 카운터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했으며 반쯤 드러누운 몸은 편안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도 지금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럴 때가 있다. 경험하는 순간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 때.
“그러니까 내 말은, 좋아한다고. 내가 너 좋아해.”
한 번 꺼낸 말은 어렵지 않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배가 고프지도,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몇 번이고 더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층침대 방에서는 얼룩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어떻게 해야 될 지···.”
“몰라도 돼. 나도 모르거든.”
얼마나 쓸어 넘긴건지 태형의 앞머리는 엉망이 되어있었다.
“나도 별로 그렇게 강하거나 똑똑한 사람이 아니야.”
방에서 계속해서 뭔가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캄캄했던 창밖은 부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것만 말해줘. 내가 카이로 안 가고, 여기 더 있는 게 싫어?”
조금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태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싫어. 같이 더 있을 수 있어서 좋아. 내가 이기적인거야?”
“아니.”
기척도 없이 얼룩이가 식탁 밑에 나와 있었다. 치즈와 마찬가지로 흰 양말을 신은 듯 발 부분이 하얀 얼룩이는 이마와 다리 부분에 까만 줄무늬가 있었다. 치즈보다는 조금 더 덩치가 있는 투실투실한 몸통을 갖고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도도했다. 드디어 나왔네. 얼룩이는 내가 있는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태형 쪽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울음소리를 내는 얼룩이가 내심 반가웠다.
“나도 지금 바로 누나가 좋다고 하고, 한국 가기 전까지 우린 대충 같이 노는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러면 점점 멀어지고 결국 연락이 끊어지게 될 것 같아. 그러기는 싫은데, 내 마음 이해하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말하듯 또박또박 얘기하는 모습에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표가 났다.
“이해해.”
“저번에 누나가 뭐에든 계속 자신을 던지고 싶다고 했잖아. 다이브 하고 싶다고. 그 말이 계속 생각났어. 난 다이브 하고 있나, 그런 생각.”
태형은 정전되었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난 다이버잖아. 다이브 한다면 깊게 들어가고 싶어. 들어가기 전에는 기웃거리고 망설일지라도 한 번 빠져들면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걸 다 찾아내. 이번에도 그러고 싶어.”
반쯤 쳐놓은 커튼 사이로 햇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실 겸 부엌으로 이어진 공간도 따라서 환해지고 있었다.
“기다려 달라는 게 아니야. 결국 우리가 어긋난다면 그 땐···.”
“근데 태형아.”
말꼬리를 자르자 얼룩이의 꼬리를 매만지던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넌 사랑에 성패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이미 어긋나지 않았어. 한 번은 닿았다면, 이것도 다이브 아닐까.”
태형에 비해 내가 얕은 곳에서만 살아왔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꼭 깊게 들어가야, 오래 참아야 성공한 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우린 아직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결혼의 기역 근처에도 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포만감이 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다합에서의 열흘이 빛이 바래지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것은 비단 태형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나 말이 맞을 지도 몰라. 어긋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난, 깊게 잠수하는 다이버가 되고 싶어. 그건 단지 좋다는 감정으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 바다를 사랑한다고 무작정 뛰어들면 안 되는 것처럼.”
“처음부터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아무리 숙련된 다이버여도 처음부터 30m에서 시작할 수는 없어.”
말싸움에서 이기고 싶은 게 아니었다. 태형을 설득해서 내 쪽으로 넘어오게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한번쯤은 무작정 뛰어들어보고 싶었다. 두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네 마음 존중해. 근데 난, 어디까지 내려갈지 몰라도 그냥 뛰어들어 보고 싶어. 그게 내 마음이야.”
몸을 둥글게 만 얼룩이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멍한 채로 밝아진 태형의 부엌에 앉아있는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창밖으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를 못한 엘피 판처럼 생각이 이 곳 저 곳으로 튀었다.
“이만 갈게. 안 데려다줘도 돼.”
이른 아침을 시작한 현지인이 페달을 밟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뭉쳐져 있는 구름 틈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했다. 결국 셔츠는 못 돌려줬네. 댐에 차오른 물을 방류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다만 쏟아져 들어간 물이 태형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잘게 부서진 돌멩이를 발로 걷어차려던 찰나 경쾌한 알림 음이 울렸다.
- 늦잠 자고 내일 펀 다이빙 하러 가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입꼬리를 움직였다. 이제 완전히 떠오른 해가 정수리를 비추고 있었다. 뒤척이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맹렬했다. 이불을 바디 필로우처럼 끌어안고, 오른쪽 다리가 왼쪽 골반을 지나치도록 구십 도로 넘겼다. 방 왼편에 엉망이 되어 있는 짐들이 눈에 보였지만 캐리어를 정리할 시간은 없었다. 펀 다이빙하기 전에 카페를 가자고 할 요량이었다. 구글맵을 별점 높은 순으로 설정한 뒤 에어컨이 가장 잘 나온다는 카페에 별표를 눌렀다. 새삼 태형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질리게 가던 카페를 간 적도, 맛집 투어를 한 적도 없었다. 대신 바다에 들어갔고, 별을 봤으며 캠프파이어를 했다.
화장실 거울에 바짝 붙어 눈썹을 다듬었다. 대낮임에도 노후화된 숙소의 화장실은 어두침침했다. 고작 열흘 만에 멋대로 자라난 눈썹 산을 깎으며 이집트에 온 뒤로 미용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오늘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톤 업 선크림을 바르고 좌우 대칭을 신경 쓰며 눈썹을 그린 후, 립밤과 립스틱을 섞어서 입술에 바르자 두 배는 생기 있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가져온 옷들은 다 고만고만했지만 개중 퍼스널컬러에 제일 매치되는 탑을 입었다.
몇 시쯤 만나지? 태형에게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내려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을 터치하자 읽지 않은 DM 메시지가 팝업창에 떠올랐다.
- 셔츠 그냥 너 가져.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짐이 되니 셔츠를 가져오지 말라는 건지.
무슨 말?
메시지를 보내고 태형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태형이 올린 게시물은 세 개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2년 전에 멈춰있었지만, 메시지 답장을 하면서 그 사진들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비공개 계정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서로 팔로우가 되어 있었던 태형의 인스타그램은 내가 볼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 있었다. 프로필 옆에는 팔로우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파란색의 팔로우 단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내 계정으로 들어가 팔로워 목록에서 태형의 계정을 검색했다.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돌아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지는데 머리 회전은 느려지는 것만 같았다. 정리되지 않는 상황이 뒤죽박죽 섞여 뱃속 안에서 굴러다녔다. 태형은 서로 간의 팔로우를 끊었고, 셔츠를 그냥 가지라고 했다. 누가 보아도 거절당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왜?
아직 태형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메시지 창에 다시 접속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들이 손가락을 통해 글자가 되었다.
오늘 보지 말자는 뜻이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팔로우 왜 끊었어?
아니 만나서 얘기해.
메시지 폭탄을 보내자 비로소 읽음 표시가 떴다.
미안. 못 하겠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말이었다. 너도 마음 있다며, 펀 다이빙 하자며, 갑자기 뭐 때문인데, 줄줄이 써 나가던 마음 속 말들이 전체 삭제를 누른 듯 사라졌다. 너무나도 간결하고 깔끔한 정리였다.
핸드폰 화면을 꺼버린 뒤, 걸터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드러누웠다. 간만에 드라이를 한 머리가 정전기를 일으키며 이불에 달라붙었다. 갑자기 자세를 바꿔서 어지럼증이 일었다.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을 느끼면서 어제의 대화들을 복기했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아님 처음부터 잘 되고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아니, 그래도 그럴 리가 없었다.
팔로우 다시 받아줘. 그리고 만나서 얘기해.
저녁에 앞으로 갈게.
구질구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마지막 온정을 베푸는 건지, 태형은 팔로우를 받아주었다. 비록 내 계정을 다시 팔로우 하진 않았지만.
다합에 온 이래 처음으로 아무 계획 없이 침대를 굴러 다녔다. 저녁에 태형을 만나기로 했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몸에 꼭 맞는 탑이 숨통을 조였지만 다시 갈아입기조차 귀찮았다. 배가 고파오는 게 느껴졌지만 일어날 의지가 없었다.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태형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누구를 팔로우하고 있는지, 또 누가 태형을 팔로우하고 있는지 목록을 샅샅이 뒤졌다. 전 여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온 걸까. 팔로워 목록을 한 명 한 명 눌러봤지만 뚜렷하게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팔로워 중 전반적으로 여자가 많다는 점은 언짢은 일이었다. 태형의 계정 자체는 재미가 없었다. 몇 년 전 찍은 뒷모습 사진 몇 개. 단서가 너무 적었고, 따라서 유추할 수 있는 것도 적었다.
그러나 계정이 태그된 사진 칸에 들어갔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이빙 샵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태형과 자파리, 무스타파를 태그해 게시글을 올린 것들이 모두 피드에 남아있었다. 바다 속에서 고프로로 찍은 사진, 태형 네에서 밥을 해 먹은 사진, 베두인 카페의 장작더미를 찍은 사진···.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시간대별로 펼쳐져 있었다. 재희 언니 외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게시글은 많았지만 정작 태형의 사진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눈길을 잡아 챈 사진이 하나 있었다.
열 장을 가득 채운 게시글이었다. 그 중 남자와 여자가 라이트하우스 거리를 손잡고 걸어가는 뒷모습 사진이 있었다. 태그 된 계정은 태형. 지금보다 짧은 뒷머리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태그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속았다는 것이었다. 사랑이 어렵고, 연애도 못하겠다며. 장기연애 말고는 연애한 적 없다더니. 내가 한 달 만난 사람은 내 연애사에 포함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태형도 가벼운 만남들은 전부 삭제 처리를 해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나와는 만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지 그것 또한 분했다. 혹시 내가 너무 진지해보여서 미리 도망치는 걸까.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나와 펀 다이빙을 하러 가고 있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뜨끈뜨끈해진 핸드폰을 쥐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는 화장기가 남아있었고, 조금 부스스했지만 드라이 한 머리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오히려 스스로를 더 우습게 만들었다. 그냥 평소대로 할 걸. 할 말을 정리하면서 천천히 내려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엘리베이터는 재빠르게 태형이 있는 로비 층에 나를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