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31.
어쩌다 보니 3년째 여름마다 경주를 오고 있다. 그 3년 동안 경주는 한결같이 더웠다. 여름이라 당연히 그렇겠지만 경주는 항상 주변 도시보다 더 더웠던 것 같다. 이 더위에도 경주를 또 왔고, 어김없이 경주박물관에도 왔다. 하지만 오늘은 경주박물관 내에서도 처음 가보는 신라천년서고라는 도서관을 방문했다. 나의 취향을 아는 언니가 꼭 가보라고 한 곳이다.
올해 10월부터 있을 APEC을 준비하고 있어 경주의 유명관광지들이 주차장 공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경주박물관 주차장도 공사 중이라 박물관 입구부터 몹시 혼란스러웠다. 무더운 날씨에 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시원하고 고요한 박물관을 기대하며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평일이라도 7월 마지막주 휴가철이고, 더운 날씨 때문에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지 내부 공기도 후덥지근했다. 그래도 반가운 유물들과 새로운 유물들을 눈에 담으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늘의 주 목적지인 신라천년서고를 찾았다.
천년서고의 입구는 이곳이 비밀의 장소인 듯 찾기가 조금 힘들었다. 공사하는 월지관 뒤에 난 작은 길을 찾아 계단을 내려갔다. 서고에 들어서니 시원하고 조용하다. 소란스럽고 후덥지근했던 박물관에서 만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석등이 반겨준다. 석등은 도서관에 있기 얼마나 어울리는 물건인가. 차가운 돌로 만들어졌지만 따뜻하고 밝은 불을 가만히 품어준다. 석등 뒤로 액자 같은 창문에 대나무가 보인다. 도서관 안에서 보는 여름은 더위는 없고, 그저 싱그럽고 푸르기만 하다.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그리 크치 않은 크기였지만 곳곳에 다양한 의자가 놓여있어 취향에 맞게 도서관에 머무르기 좋았다. 입구 왼쪽에는 경주박물관 특별전시 주제인 '고려청자'에 관한 책들이 큐레이션 되어있었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에는 서가가 나란히 줄을 맞춰 서있다. 도서관 벽은 크기가 다양한 창문들이 여름을 한 폭의 액자에 담은 듯했다. 책을 보다 고개를 들면 싱그러운 여름을 느낄 수 있어 책을 읽지 않아도 눈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신라천년서고는 일반적인 책은 없다. 도서관이 있는 장소에 맞게 역사와 유물에 관한 책들이 많다. 딸은 서가를 한참 둘러보더니 함께 갔었던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주제로 한 책을 가져왔다. 경험한 만큼 관심이 확장되는 법이다. 이럴 땐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데리고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딸은 찾은 책을 오래 읽지는 않고 곧 스마트폰에 빠져들었지만 서가에서 책을 열심히 찾고, 책 속에 마음에 든다는 그림을 내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고맙고, 예뻤다.
무슨 책을 읽을까 서가를 살피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재미있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를 찾았다. 얼마 전 유홍준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님이 되신 것도 무척 반갑기도 했고 말이다. 다음 주에 서울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마침 6권이 경복궁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해서 더 관심이 갔다.
책의 첫 부분부터 마음에 꽂힌 것이 있었다. 바로 '한국인의 이중적 문화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외국의 거대한 문화유산을 보고 우리 문화를 독창성이 적고 스케일도 초라하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작가는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뒷간밖에 안 된다."는 식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기 비하를 언급하기도 했다.
영국의 유력한 예술매체에서 발표한 전 세계 박물관 연간 관람객수 조사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람객수로 세계 6위라는 기사를 최근에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박물관도 내가 동경하던 유럽의 박물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놀랐다는 것 자체가 실은 나도 '한국인의 이중적 문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가 유럽보다 못하다고 말이다.
올해 초 유럽여행을 가며 파리 루브르박물관과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다녀왔다. 가장 기대를 많이 하고 간 곳이기도 했는데 대영박물관은 기대에 못 미쳤고, 루브르박물관도 책에서 보던 미술작품들만 기억에 남았고 투어가이드가 소개한 문화재 중 인상적인 것은 다른 나라에서 약탈한 문화재였으며, 그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문화재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물론 내가 식견이 부족한 이유도 있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을 직접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 경주박물관을 방문해 보니 그전에 왔을 때의 느낌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경주박물관을 둘러보는 데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지지 않는다는 생경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금관의 찬란함과 루브르 박물관의 찬란한 장신구, 웃는 기와의 따뜻한 미소와 모나리자의 미소, 로제타스톤의 발굴과정과 천마총과 금관총의 발굴과정은 모두 다 놀라운 것이다.
우리나라도 우리 나름의 고유한 문화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문화의식을 새삼 느꼈다고 할까. 유홍준 교수님의 말처럼 실은 경복궁이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졌으며 자연과의 조화로 빼어난 한국적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고 말이다. 또한 최근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속의 우리나라 문화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에서도 주목하는 우리나라 문화를 사실은 우리가 제일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부터도 그랬으니.
여러 번 갔던 국립중앙박물관이지만 다음 주의 예정된 방문이 이렇게 기대되는 건 내 마음이 이렇게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문을 닫는 오후 6시가 다 되어가 신라천년서고를 나왔다. 나오는데 종소리가 들려온다. 정해진 시간마다 울리는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다. 요란하고 다급한 매미소리 사이에 맑고 느린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천천히 가도 좋다고 말하는 것 같다. 더위를 피해 시간에 쫓겨 바쁘게 걸어 나가다 속도를 줄여본다.
그래, 느려도 괜찮다.
빨리 가면 더 덥기만 하지,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똑같다!
<국립경주박물관내 신라천년서고>
-월~금요일 10:00~18:00 (토, 일, 공휴일 휴무)
(매월 1, 3주 토요일 10:00~18:00)
-자료열람과 복사만 가능, 신라 및 경주 관련 도서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