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혐오' 극복기9: 집단주의적인 왜곡을 넘어

9회 ― 금송아지로의 귀환

by 수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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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무지한 것은 차라리 괜찮다. 당신은 어떠한가? 신화를 비웃거나,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마음은 없는가? 만약 있다면, 그 순간부터 ‘신화혐오/미토헤이트’mytho-hate는 시작된다.

신하비하, 신화혐오, 신화공포—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정체는 개찐도찐 정도의 차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 당신의 신화혐오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 시작은 가벼운 회의주의이다. 이것이 교육과 제도를 통해 고착되면, 왜곡된 집단지향—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억누르며 이기주의와 혼동되는 구조—이 신화적인 상상력을 질식시킨다.

결국, 신화는 문화자원이 아닌 미신으로 몰리며, 공동체의 풍요로운 집단표상으로 성숙해갈 계기를 잃어버린다. 이를 넘어서는 길은 신화풍요의 비판적인 계승, 곧 금송아지로의 귀환이다.

신화를 서사의 첫 언어로 우리가 다시인식할 때, 우리는 왜곡된 집단지향을 넘어 개인의 자율과 공동체 결집력을 조화시킬 수 있다.

이번 연재는 '신화혐오'의 피라미드 구조를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가벼운 회의주의로부터 전면적인 배척 곧 철폐까지, 국내외 사례들을 비교하며, 왜곡된 신화혐오가 어떻게 신화적인 상상력을 억누르는지, 그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이를 넘어서는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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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새 문명을 짓는 토대다Myth is the foundation for building a new civilization.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2016), Interview on Culture (1995)



신화혐오는 “금송아지를 만들다간 죽는다”는 공포를 심어왔다. 그 결과 한국문명은 상상력의 리디스크립션을 회피하며 신화결핍 속에 갇혔다. 이제 금송아지= 신화풍요를 다시세우고, 비판과 계승을 병행하는 다시창조의 길을 열어야 한다.



신화혐오의 피라미드 ― 집단공포의 구조화

신화혐오의 5단계 피라미드의 맨 아래는 “정말 믿을 만한가”라며 신화 자체를 회의하는 1단계의 편향bias, 그 위로 신화를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잔재로 치부하는 비신화화하는 2단계의 비하derogatory, 그리고 “금송아지=신화풍요”의 시도를 사이비·국수주의·퇴행이라 조롱하는 3단계의 모욕insult, 그리고 반사회적인 위험물로 4단계 위협threat하고, 5단계 배척exclusion하는 층들이 겹겹이 쌓인다.

이 피라미드는 곧 금송아지만들기에 대한 집단공포가 어떻게 회피와 보신주의로 어떻게 구조화돼 왔는가를 보여주는 압축적인 도식이다. 신화혐오의 최종적인 결과는, “금송아지를 만들려다간, 그러다 넌 죽는다”라는 내면화된 규범, 곧 사회적인 상상력의 질식이다.



신화는 집단 상상력의 핵심이며, 비판적 계승으로 이어진다Myth is the core of collective imagination, leading to critical inheritance.

―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 『신화와 실재』 Myth and Reality (1963)


주술신화서사의 억압과 신화결핍

주술신화서사라는 것은 공동체적인 다정함의 최초 서사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불확실하고 모호하며, 기존의 경계와 규범을 흔들어, 집단표상을 원초적으로 리셋하고 다시구성하는 불온한 힘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한국지성들은 이 힘에 대한 공포-회피-보신주의를 내면화했고, 그 결과가 한국문명의 신화결핍이고, 둘은 서로를 악무한하고 있다.

신화자산의 창조적인 리디스크립션 곧 금송아지만들기는 언제나 위험과 이단으로 낙인찍히며 단절돼 왔다. “금송아지를 만들려다간 사회적으로 매장되거나, 심하면 생명까지 위협받는다”는 암묵적인 규범은 창조적인 상상력 자체를 위험부담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문명은 금송아지만들기, 곧 신화풍요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회피하게 됐다. 주어진 질서 속에서 그저 즉자적인 생존만을 추구하는 보신주의에 급급해야만 했고, 그결과 한국문명의 사회적인 상상력과 공동체적인 다정함의 근육은 퇴화했다.



실존 사례의 증언 ― 매장과 고립의 궤적

억압은 창작자들의 삶에서 되풀이됐다. 다음 실존 인물들의 삶을 보면, 이런 신화혐오의 보신주의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알 수 있다.

시인 김점용은 정체성과 욕망의 경계를 흔드는 시적인 리디스크립션을 꾀했지만, 교직을 잃고, 그의 고통에 무감각한 제도권 문단의 외면 속에서, 병마와 고립을 견디다 세상을 떠났다. 최승자의 불온하고 원초적인 상상력 또한 외면과 고립을 겪었고, 기형도는 시대적인 폐허 속에서 퀴어적인 정동을 시로 응시했으나 요절했다.

누구보다 사회적인 매장과 죽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마광수이다. 그는 성애적인 욕망과 자유를 불온한 언어로 세우려 했으나, 음란과 저속의 낙인 속에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끝내 삶을 마감했다.

이들의 궤적은 “금송아지만들기”가 보신주의를 벗어나 불온한 힘이 될 때, 어떻게 사회적인 배척과 매장, 때로는 죽음으로 이어지는지를 입증한다. 공포-회피-보신주의의 집단심성 속에서 창조적인 리디스크립션은 실질적으로 단절당했고, 공동체적인 다정함의 원초적인 힘은 획일과 경직 그리고 모방의 황무지로 내몰렸다. 이것이 한국문명구조를 결정짓는 신화결핍이다.



신화없는 문명, 불임의 역사

신화혐오는 단지 신화서사를 차단한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문명의 사회적 상상력 자체를 황폐하게 했다. 신화는 시간 앞의 구조이고, 역사는 시간 뒤의 이행이다. 신화는 문명과 사람존재의 원형적인 심층이고, 역사는 이 심층을 통과해 표층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신화를 다시-쓰기하지 못하는 자는 역사를 새롭게 말할 수 없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오늘날 한국문명은 신화결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화를 소재나 장식으로 빌릴 뿐, 구조 자체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훈련에는 소극적이다. 감정의 회고, 사실의 나열만을 반복할 뿐 신화풍요의 리디스크립션은 거의 사라졌다.



신화를 다시 쓰는 자만이 역사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Only those who re-describe myth can re-construct history.

―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1931~2007)


미래를 여는 집단적 리디스크립션

이제 한국문명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다. 공포-회피-보신주의 구조를 직시하고 돌파할 신화리디스크립션을 위한 사회적인 대화의 용기다. 보신주의를 허물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집단표상을 창조적으로 다시 세우는 실험들이 절실하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향은 다음과 같다.


교육: 신화를 ‘옛 이야기’로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를 해체·재구성하는 훈련으로 전환해야 한다.


제도: 창작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실험을 지원하는 사회적인 틀을 마련해야 한다.


공론장: 신화풍요를 금기가 아니라 집단표상의 다시생산으로 인정하는 사회적인 대화장치를 확충해야 한다.


“금송아지만들기”가 두려워 공포와 보신주의에 갇힌 집단심성의 사슬을 끊고, 신화결핍을 극복해 리디스크립션의 능동성을 되찾는 일. 이것이야말로 공동체의 다시태어나기와 다정함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이다.

금송아지를 다시 세우는 순간, 한국문명은 신화혐오의 굴레를 벗고, 신화결핍을 넘어, 신화풍요의 리듬을 회복하며, 새로운 다정함과 창조의 시대를 열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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