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혐오' 극복기8: 집단주의적인 왜곡을 넘어

8회 ― 신화혐오 1~ 5단계 총정리

by 수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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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무지한 것은 차라리 괜찮다. 당신은 어떠한가? 신화를 비웃거나,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마음은 없는가? 만약 있다면, 그 순간부터 ‘신화혐오/미토헤이트’mytho-hate는 시작된다.

신하비하, 신화혐오, 신화공포—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정체는 개찐도찐 정도의 차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 당신의 신화혐오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 시작은 가벼운 회의주의이다. 이것이 교육과 제도를 통해 고착되면, 왜곡된 집단지향—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억누르며 이기주의와 혼동되는 구조—이 신화적인 상상력을 질식시킨다.

결국, 신화는 문화자원이 아닌 미신으로 몰리며, 공동체의 풍요로운 집단표상으로 성숙해갈 계기를 잃어버린다. 이를 넘어서는 길은 신화풍요의 비판적인 계승, 곧 금송아지로의 귀환이다.

신화를 서사의 첫 언어로 우리가 다시인식할 때, 우리는 왜곡된 집단지향을 넘어 개인의 자율과 공동체 결집력을 조화시킬 수 있다.

이번 연재는 '신화혐오'의 피라미드 구조를 5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가벼운 회의주의로부터 전면적인 배척 곧 철폐까지, 국내외 사례들을 비교하며, 왜곡된 신화혐오가 어떻게 신화적인 상상력을 억누르는지, 그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이를 넘어서는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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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혐오 1~ 5단계 총정리


신화혐오는 편향에서 시작해 배척으로 끝난다—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제도화된 언어다. 7회차까지 우리는 조롱과 낙인이 공동체의 상상력과 다정함을 어떻게 질식시키는지 보았다. 조롱은 개인의 본성이 아니라 집단이 우월함을 확보하기 위해 가동하는 장치였고, 그 장치는 늘 다음 단계를 향해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여기서 작동하는 축은 ‘개인의 자유·자율·권리’를 존중하는 건강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집단규범을 앞세우면서 개인의 자율을 이기주의라고 낙인찍는 집단주의이다. 불확실함과 다원주의를 감당하지 못해 사회적인 상상력을 잘라내고, 신화가 지닌 원초적인 다정함을 집단기억 또는 문화기억 또는 집단표상으로부터 떼어내는 이 구조가, 피라미드의 경사면을 만든다.

최종적으로, 신화를 사회적인 위협으로 명명하는 순간 억압은 정당화되고, 끝내 상징과 전승자를 제거하는 폭력에 암묵적인 동의가 붙는다. 이번 회차는 신화혐오 피라미드 5단계를 그 공식이름들과 규정대로 정렬해 조망한다. 단계 사이를 밀어 올리는 ‘가속메커니즘’을 해부하고, 가속을 멈추는 개입점을 설계한다.



1단계 신화편향: 회의가 부정적인 편향으로 굳는 순간

신화편향은 ‘신화가 믿을 만한가’라는 물음이 부정적인 편향으로 굳어져, 검토가 아니라 회피의 습관이 되는 국면을 말한다. 공론장에서 발언권없는, 이미 물러난, 자리에다 신화를 배열하고, 신화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 1단계 신화혐오이다.

교육과 매체의 표준 글들 속에서 “재미는 있지만 지식은 아니다”라는 정서가 상식으로 고정되고, 사회적인 상상력에 기여하는 신화의 공공적인 가치는 사적인 취향 정도로 축소된다. 이때 집단주의적인 이기주의는 가장 조용하게 작동한다. 신화가 갖는 특유의 다정한 불확실함과 다원주의는 ‘혼란’으로, 개별 해석의 자유는 ‘무책임’으로 번역된다. 합리성의 어휘를 독점하는 집단규범은 신화의 문제의식 자체를 억압한다.


신화편향 담론: 신화를 ‘'아이들의 우화’ 수준으로 격하하며 성숙/미성숙의 위계를 세운다. 이 위계는 물음을 닫는 장치로 기능해, 신화를 믿는 자를 자동으로 ‘마개한 자’로 분류한다. 이때 회의는 탐구의 출발이 아니라 배척의 면허증이 된다. ‘신화같은 걸~ 뭘 대단하다고~!’


신화풍요 담론: “신화는 공동체의 상상력을 결집시키는 첫 언어다”라는 인식은 사실 vs 허구의 2분법을 넘어, 신화 특유의 원초적인 다정함들에 주목한다. 신화가 세계를 의미있게 묶는 방식, 공공정체성에 다정함을 물들이는 방식을 묻는다. 의심를 폐기하지 않고, 의심 자체를 다정하게 다시형상화해낸다.



이 전환에 실패하면 1단계의 ‘무해한 회의’는 곧 2단계의 ‘타당한 비하’로 미끄러진다. 의심은 성찰이 아니라 방치된 편견이 되고, 편견은 곧 표준설명이 된다.



2단계 신화비하: ‘합리’의 말투가 위계를 만든다

신화비하는 과학을 유일한 검증언어로 삼는 틀과 결탁한다. 신화는 2단계에서 ‘시대착오적인 오류’로 번역된다. 여기서 과학은 방법론이 아니라 문화적인 위계를 정당화하는 헤게모니이다. 예컨대 교육커리큘럼 편성에서 신화 단원은 도입·부록으로 밀려 총 차시가 보잘것없게 줄어들고, 공공문화지원 심사표에서는 ‘즉시효용·홍보효과’ 항목이 신화서사형 프로젝트의 점수를 체계적으로 깎는다. 집단기억을 표현하는 언어는 더 매끄러워지고, 배척은 더 조용해진다. ‘합리’라는 깃발 아래 집단표상의 생태계가 축소된다.


신화비하 담론: “신화는 시대착오적이며 비합리적이다”라는 판단은 문화적인 위계의 표준말투가 된다. 이 말투는 신화를 ‘저급한 지식’의 서랍에 수납하고, 신화적인 상상력을 교양의 변두리로 밀어낸다.


신화풍요 담론: “신화는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고 공동체를 묶는 상징 체계다”라는 관점은 과학과 신화를 적대가 아니라 분업—접속의 관계로 다시배열한다. 서로 다른 검증질서와 기능을 인정하면, 신화는 오류가 아니라 집단표상의 핵심자원으로 복귀한다.



비하의 상시화는 다음 국면에서 인물을 향한다. 대상의 가치절하가 발언자를 향한 낙인으로 치환되는 순간, 토론의 장은 뒤집힌다.



3단계 신화모욕: 논증이 정체성 공격으로 바뀐다

신화모욕은 대상에 대한 비판이 발언자 낙인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국면이다. 신화옹호자는 사이비·광신·국수주의로 묶이고, 논증은 ‘그 편’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폄하된다. 조롱은 ‘풍자’라는 심미감성의 가면을 쓰고 유통되고, 발언은 위축되고 자기검열이 확산된다. 값싼 모욕은 공공의 상상력을 가장 비싸게 소모시킨다. 왜냐하면 모욕은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능력을 집단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신화모욕 담론: “신화를 믿는 자는 무지하며, 신화는 기만의 수단이다”라는 프레임은 내용을 논박하지 않고 사람을 낙인찍는다. 공공적인 토론은 논증에서 정체성 심문으로 교체된다. 폭은 좁아지고 톤은 거칠어진다.


신화풍요 담론: “신화는 허위가 아니라 구조적인 언어다”라는 해석은, 신화가 집단기억의 표상재현체계와 상징질서를 드러낸다고 본다. 신화모욕은 누군가의 주장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공공의 상상력 자체를 파괴한다. 이 능력이 사라지면 다음 단계인 ‘신화위협’은 현실감을 얻게 된다.



모욕이 누적되면, 신화는 위험하다라는 4단계 프레임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그 프레임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보호한다고 믿는다. 바로 그 믿음이 신화혐오를 정당화한다.



4단계 신화위협: 가치 논쟁이 치안의 언어로 치환된다

신화위협은 신화의 사회적인 존재 자체를 위험요소로 간주하는 단계다. 해로움·선동·질서훼손의 경고문이 표준양식처럼 복제되고, 신화의 보존·전수·교육은 막아야 할 반사회적인 위험한 활동으로 선언된다. 신화를 둘러싼 사회적인 대화 자체가 무가치해지고 무의미한 것으로 낙인찍히고, ‘안전’과 ‘위생’의 언어가 집단심성을 장악한다.

축제·박물관·교과에서 신화의 호흡이 짧아지고, 전승의 장소들은 서로 고립된 섬으로 흩어진다. 제도적인 글귀 몇 줄—“사회통합” “시대정신” “공공안전”—이 미세한 신화혐오의 트리거로 기능한다.


신화위협 담론: “신화는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며 제거 대상이다”라는 진단은 즉시 행동지침으로 번역된다. ‘장애물’이라는 낙인은 곧 ‘제거명령’이다.


신화풍요 담론: “신화는 공동체 기억의 저장소다. 신화를 파괴하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일이다”라는 경고는, 신화위협이 낡은 이야기의 제거 정도가 아니라 집단기억을 절단내고, 공동체의 원초적인 다정함을 황폐화시키는 것임을 말한다.



신화위협의 프레임이 굳어지면 마지막 단계는 생각보다 쉽게 호출된다. 이미 준비된 강압의 신화혐오가 ‘공익’을 호명하며 등장한다.



5단계 신화배척: 상징폭력이 제도폭력이 된다

신화배척은 신화상징과 전승자를 제거대상으로 규정하고, 폭력적인 수단의 정당성이 암묵적인 동의로 확산되는 단계다. 탄압·추방·처벌 같은 강제장치가 ‘공익’과 결합해 배척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공공영역에서 신화의 실존은 사실상 소멸하고, 공동체의 기억은 호흡을 잃는다. 철폐주의는 여기서 피라미드를 닫아 버린다.


신화배척 담론: “신화의 옹호자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라는 집단심성은 상징폭력을 제도폭력으로 번역한다. 강제의 정당성은 ‘위험제거’라는 이름으로 봉인된다.


신화풍요 담론: “신화는 공동체를 움직이는 정체성의 원천이다”라는 인식은, 배척의 정당화가 곧 공동체의 자기파괴임을 드러낸다. 제거는 효율이 아니라 자해다. 사회적인 상상력의 근육을 스스로 절단하는 일이다.



혐오의 가속메커니즘: 왜 이렇게 빨라지는가

혐오가속은 언어·제도·규범이 서로의 정당성을 교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회의의 상식화는 비하를 사실인 것처럼 들리게 만들고, 상시화된 비하는 모욕을 ‘풍자’로 위장한다. 모욕이 누적되면 ‘사회적인 위험’의 가정이 현실감을 얻고, 위험프레임은 보존·전수를 막는 조치에 명분을 제공한다. 그 조치는 배척과 강권을 ‘공공이익’으로 선언하게 만든다. 여기에 제도화의 관성이 붙는다.

검증가능성을 가치의 전부인 냥 환원하는 기준이 교육과 행정에 스며들면, 신화는 공공효용을 입증할 역량 자체를 봉쇄당한다. 왜냐하면 신화적인 상상력은 그자체가 모호하고 애매하고 불확실하고 다원주의적이고 심지어 불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가표 어디에도 ‘정체성·응집·상상력’의 장기가치를 적을 칸이 없다.

이 모든 고리가 곧 집단주의의 작동 도식이다. 집단주의는 스스로의 규범만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이고 사회전체의 합의라는 자기확신 아래 이질적인 목소리를 ‘혼란·위험·가성비꽝’이라고 이름붙이고, 그 이름붙이기가 경사면의 윤활유가 된다.



전환의 문턱: ‘금송아지의 귀환’을 설계하다

1단계 신화편향으로부터 5단계 신화배척까지, 신화혐오피라미드의 경사면들은 개인의 의심에서 집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연속 체인이다. 체인의 각 고리는 신화적인 상상력들 고유의 불확실함과 다정함 그리고 다원주의를 혐오하는 서사들—의심의 상식화, 비하의 정상화, 모욕의 미학화, 위해 프레임의 치안화, 배척의 합리화—로 연결된다. 그러나 구조의 해부는 곧 설계의 출발점이다. 사회적인 상상력을 낭비로 보던 감각을 공공자산의 감각으로 뒤집는 순간, 가속은 멈춘다.

‘금송아지의 귀환’은 우상숭배의 복귀가 아니다. 비판없는 숭배도, 전면폐기도 아닌 ‘비판적인 계승’의 다시구성이다. 공동체가 자기서사의 첫 언어이자 원초적인 다정함의 원천을 다시창조적으로 되찾는 행위다.

다음 9회차는 이 귀환의 길을 3축으로 구체화할 것이다. 과학·신화의 기능 분업—접속 설계, 전통 신화자산들의 리디스크립션 프로토콜, 교육·심의 기준의 공공가치 항목화. 폐기가 아니라 접속과 리디스크립션. 그때 공동체는 집단표상의 근육을 다시 단련하고, 경사면은 설계된 저항으로 바뀐다. 악순환은 끊어진다. 그리고 비로소, 신화적인 상상력은 공동체의 다정함을 회복시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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