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지냈던 독서의 묘미 - 강화도 '책방시점'에서
#1
2023년 만 서른하나의 여름.
책을 좋아했던 꼬마는 글을 쓰는 어른이 된 이후 책을 잘 읽지 않게 됐다.
변명하자면 이렇다. 나의 '기자'라는 직업 때문이라고, 혹은 '글독'이 올라서라고.
기자는 독자에게 사실을 전하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평소 주로 읽는 글은 주로 정보성이며 쓰는 글도 정보성이다. 업의 특성상 누구보다 빨리 배우고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때 누군가의 내적 세계와 감성, 경험이 중심인 주관적인 글을 읽기란 쉽지 않다. 또 그렇게 습득한 정보를 토하듯 다시 써내리는 글은 나의 심신을 채우기보다 소진하기에 바쁘다. 매일 그런 글을 읽고 쓴 뒤 퇴근하면 나는 '휴식'을 핑계로 책과 멀어지곤 했다.
#2
사실 책을 잘 찾지 않게된 이유 중엔 책을 대체할 미디어가 워낙 많은 세상이란 점도 있다. 이건 아마 나와 같은 기자나 글을 업으로 삼는 이가 아니라도 공감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숏폼이든 롱폼이든 누구나 알만한 동영상 플랫폼들에 접속하면 단시간에 원하는 부분만 빠르고 재미있게 소비할 수 있는 컨텐츠가 넘쳐난다. 반면 책은 여타의 미디어들보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소화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웬만한 책 한권 값이 유튜브 한달 유료 구독권과 맞먹는 시대다. 이처럼 책이 느리고 비싼 탓인지 사람들은 점점 책을 외면한다.
하지만 때때로 내 안에 책에 대한 갈급이 불쑥 올라오는 순간들이 있다. 책을 떠난 세상은 징그럽도록 빠르고 날카롭게 달리기 때문이다. 평소엔 그 자극과 속도감에 취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비로소 느낀다. 내가 마치 끝나지 않은 롤러코스터에 앉아있는 것 같다고. 물론 눈을 감으면 여전히 스릴이 넘치겠지만 오래 타면 잠시 내리고 싶은 그런 마음 같은 거다.
바로 그런 순간들에 탈출구처럼 책이 떠오른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책으로서 한 사람의 사유를 긴 시간에 곰곰히 소화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때론 화자의 메시지에 공감하고 때론 나와 다른 가치관을 뜨악한 마음으로 마주하면서도 세상을 달리 보는 방법을 터득하곤 했다.
그러다보면 개중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삶에 영향을 주는 메시지들도 마주하게 된다. 예컨대 이정현의 소설 '아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편지 구절이 나온다.
"사람냄새가 그리우면 또 만납시다. 정말 사랑했소."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람냄새'라는 단 네 글자에 얼마나 애달프고 따뜻한 의미가 한가득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냄새'는 책을 읽은지 십수년이 흐른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다. 세상이 아무리 차갑게 깨져가더라도 적어도 나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길'이란 바람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혹은 안도현의 소설 '연어'에서 "연어가 인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인간이 연어를 옆에서 보지 않고 위에서 보기 때문"과 같은 표현도 어린시절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구절이었다. 이로써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내려다 보지 않고 옆에서 동등한 시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일들은 겪으면 내가 책을 읽었던 그 시간들이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잘 휘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숙성되어 들인 시간 이상의 가치가 우러나오기도 한다. 때론 추억을 곱씹을 때 느끼는 아련한 감정이 덤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이만하면 책은 여전히 읽을만해 보인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쉽게 책을 펴지 못한다. 오기로 책을 폈다가도 며칠에 그칠 뿐. 아 - 자극에 한없이 약한 나란 인간이여... 책이 좋은 이유를 아무리 줄줄 늘어놓아도 책에 온전히 집중하기엔 나를 둘러싼 자극적인 정보와 호출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그렇고, 저래서, 책을 그리워할 뿐 읽지 않았다.
#3
그러던 올 여름, 아내와 '힐링'을 주제로 설정한 여름휴가의 첫 코스로 북스테이를 선택했다. 종종 북스테이 이야기를 하던 아내의 제안이었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동안 아내도 나와 다르지 않은 이유(기자였다)로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터다. 무엇보다 북스테이는 그간 책을 멀리했던 이유가 단지 변명은 아니었나하는 스스로의 궁금증을 확인하면서 독서의 여유를 다시 한번 충만히 느껴보고자 하는 기대감이 따르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기대는 틀리지 않았고, 옳았으며, 만족스러웠다.
우리 부부가 방문한 북스테이 장소는 강화도의 한 조용한 도로 위 비탈에 지어진 '책방시점'이다. 첫인상부터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 비슷한 감성적 분위기가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우리가 묵은 '다락방'에 앉아 골라온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예상보다 많은 감각의 해방을 느꼈다.
이런 게 북스테이인가, 머무는 공간의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전부 '이곳은 당신이 책을 읽고 싶도록 최선을 다했어'라며 살랑이는 듯했다. 바닥, 벽지, 조명, 색감, 소품, 고요한 가운데 창밖으로 들려오는 작은 백색소음들까지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내가 바라고 기대해 마지 않았던- 책을 읽고 누리기에 부족함 없는 곳이었다.
덕분에 책을 읽다가 문득 집중이 흐려질 때 잠시 눈을 돌리더라도 나를 자극하는 것이 하나 없는 그 공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유일한 방해물은 스마트폰이었지만 과감히 '방해금지' 모드를 눌러둔 터다. 그렇게 온전히 독서를 위해 설계된 공간의 묘리를 음미하면서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 글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만 하루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켜켜이 쌓아둔 압박감은 덜어지고 여유가 회복으로 전환되는 시간이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문득 내게 말했다. "집에서도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고. 나는 "여기처럼 쉽지 않을거야. 왜냐하면 다시 돌아갈 집은 여기처럼 책에 집중하기 어려운 공간이니까"라고 답했다. 조금 덧대자면 이곳의 특수한 분위기 외에도 나는 북스테이의 제한된 시간이 나를 더 독서에 집중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은 무한정에 가깝지만 북스테이에 머무는 시간은 극히 짧다. 시간과 돈을 들여 이곳에 왔다면 다른 그 무엇보다 책에 먼저 집중해야 할 당위가 있다는 얘기다.
#4
이곳에서 내가 꺼내든 책은 에세이와 소설이다. 적어도 북스테이에서조차 언론과 저널리즘의 이야기 혹은 자기계발서처럼 마음보다 머리가 먼저 울리는 책들을 보고 싶진 않았다. '한눈에 봐도 그런 책'들을 차갑게 지나친 후 내 손에 들린 책은 이지수의 '아무튼, 하루키', 정철의 '사람과 사람 사이를 헤엄치는 동사책'이란 에세이와 김증미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었다.
셋 중 가장 마음에 든 책은 '아무튼, 하루키'다. 무라카미 하루키란 일본 작가의 '광팬'인 이지수 작가가 살면서 읽은 하루키의 책 구절들과 자신의 삶이 맞닿은 조각들을 엮어 풀어낸 책이다. (알고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과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상황에 대한 에세이로 풀어내는 '아무튼' 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한다.)
자신의 스타가 만든 작품을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책으로 엮어내다니? 이쯤되면 아무튼 시리즈의 작가들은 그 누구보다 '성덕(성공한 덕후)'라고 부를 수 있겠다. 물론 나는 이 책이 하루키에 대한 찬사로만 점철된 책이었다면 아마 반도 읽지 못하고 덮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중생 시절의 작가 자신이 왜 하루키를 좋아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한 책은 하루키의 작품과 맞닿은 사회 초년생의 모습으로, 흔한듯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여자의 모습으로, 하루키의 신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 아이 엄마의 모습으로, 오랜 친구들과 하루키에 대한 솔직한 대담을 나누는 모습으로 조화롭게 이어졌다. 책을 읽는 내내 변화하는 그의 삶에 하루키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계속 궁금해서라도 덮을 수 없는 책이었다. 또 번역가답지 않은 담백한 문체와 건조하게 치고 빠지는 작은 개그 코드들이 주는 재미는 덤이랄까.
결국 퇴실하던 날 트렁크에는 '아무튼, 하루키'가 함께했다. (훔친 게 아니다. 샀다!) 아마 집에서 다시 읽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서재에 고이 모셔둘 생각이다. 그러다 한 번씩 이번 북스테이에서 느낀 감정들이 되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더불어 아주 오랜만에 나도 다시 나만의 정겹고 인간적인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들기도 했다. 아마 곧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질 이 같은 마음을 언젠가 되살려 줄 불씨로 남아주길.
다음으로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내가 읽은 책은 벌써 80쇄를 넘어섰더라. 어릴 때 집에서도 수차례 읽은 것 같다. 그래서 대강의 내용과 분위기를 기억하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겸 택했다. 그리고 '명작은 역시 명작'이다. 책 전반에 걸쳐 그려지는 괭이부리말의 일관된 회색빛 도심 속에서 따뜻한 빛으로 나아가는 어른과 아이들의 이야기가 조화롭게 이어지는 구성에서도 나는 '사람냄새'를 느꼈다.
어떤 면에서 다소 뻔한 전개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일수록 오히려 괭이부리말의 빈곤해도 사랑으로 채워지는 순수한 관계가 주는 희망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법이다. 소설 치고 분량도 길지 않아 언제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아마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랑받지 않을까 싶은 책.
'동사책'은 아쉽게도 중간에 덮었다.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롯이 공감할 수 없는 책의 전개 때문이었다. 카피라이터 출신의 작가는 하나의 뜻을 가진 형용사와 달리 동사가 가진 다양한 함의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가겠다고 서두에 소개했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책의 각 부분도 '사랑하다' '추락하다' '견디다'와 같은 동사로 이뤄져 있고 그와 연결된(혹은 작가가 연결됐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져 있다.
그런데 실상 각 이야기는 주제 동사 그 자체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몇몇 인상적인 편을 제외하면 읽을수록 정작 동사는 부사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느낌이었달까? 더군다나 카피라이터가 쓴 책이라는 느낌이 무척이나 강했다. 극단적으로 짧게 정제된 문장과 때때로 이런 저런 함의를 우겨 넣은 듯한 표현들. 그 또한 취향의 영역이지만 긴 글로 소비하는 측면에선 더 부드럽게 풀어내지 못한 묘사와 공감대가 아쉬웠다. 물론 누군가에겐 좋은 책이겠지만 전반적으로 내 취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처음에는 최승자 시인의 '연인들'이란 얇은 시집도 챙겨왔다. 하지만 몇 페이지 읽고 이내 깨달았다. 나는 시를 잘 소화하지 못한다. 개인적으론 시작과 중간과 끝이 섬세하게 연결된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시처럼 극단적으로 압축된 글에서는 화자의 의도를 명확히 해석하기 어려울 뿐더러 집중도 잘 안되는 듯하다.
하지만 내 마음에 닿지 못한 책들이라도 그것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책의 또다른 묘미는 나와 다른 눈과 가치를 지닌 이들이 그들의 세상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구경하는 데 있다. 책은 결국 많이 접하며 소화할수록 같은 시간을 사는 사람이라도 그 깊이를 다르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누가 그랬던가, 책은 그 사람의 인생을 한 시간에 사는 거라고. 앞서 독서가 상대적으로 비싸고 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일이라 표현했지만 위 말에 미루어 보면 어떤 독서도 결코 손해는 아닐지도.
이래저래 첫 북스테이를 마쳤다. 만족스러웠고 짧아서 아쉬웠다. 분명한 건 이곳 '책방시점'이든 다른 북스테이든 다시 가게 될 것이란 것. 퇴실 후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보니 아내는 '파주 북스테이'를 검색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진 모르겠다. 무엇보다 당분간 이번 휴가처럼 긴 호흡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또 주어질까? 금새 머리가 복잡해지는 듯해 떨쳐버리기로 한다. 적어도 생각만 하던 것과 경험의 차이는 다름을 확실히 체감한 시간이었다. 북스테이로 책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깨닫고 되새길 수 있어 감사했다. 무엇보다 이제 다시 남은 생에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분명 어제보다 다를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