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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Jan 22. 2020

몽환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어젯밤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05:50분이 되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가방 안에 필기도구, 기본서, 문제집, 영어 단어장을 집어넣고 방문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까맣게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의 마지막 수능이 어제 끝났다는 것. 나는 가방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다시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수능이 끝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가방을 메고 학원에 가 자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계속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지금도 수능 현장에 남아있음을 증명해주는 느낌이었다. 후, 하, 후, 하. 이유모를 긴장감과 초조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니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계셨다. 어머니도 밤새 잠이 오지 않아 새벽 내내 야근 중인 아버지와 메신저를 주고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느끼고 있는 긴장감의 잔여물이 어머니에게도 흘러간 듯 하지만 이 긴장감은 무언가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나는 아침 새벽의 따뜻한 햇볕과 함께 상쾌한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조금은 잦아든 듯했다. 한동안 눈 앞의 TV 브라운관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다 보니 얼마 안 있어 야근 당직을 마친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나는 현관문 앞에서 아버지와 포옹했다.            


   

 나는 재수를 하는 기간 동안 묵언수행을 했던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어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부모님에게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능 전 느꼈던 긴장감, 잘못 받은 국어 시험지와 온 멘탈을 뒤집어 놓았던 국어시험의 난이도, 완벽하게 백점을 자신한 수학과 영어시험, 무난한 탐구 시험과 역전극을 이루어낸 제2외국어 시험. 그리고 내가 논술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 평상시 말도 꺼내지 않던 내가 끝없이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마치 영웅담을 늘어놓듯 나는 오랜 시간 쉴틈 없이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컴퓨터 전원을 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실시간 인기 검색어는 온통 수능과 관련된 문구들로 가득했다. 나는 기분 좋게 검색어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반응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내가 그러했듯 다들 국어시험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 듯했다. 등급컷 또한 다른 과목들에 비해 눈에 띄게 낮았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올린 수능 소감문에 크게 공감하며 나는 갑자기 생겨버린 나의 기나긴 여유시간을 즐겼다.               



 인터넷 서핑이 지겨워질 때쯤 나는 수능을 응원해주던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로 오래간만에 반가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나의 수능 결과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잘 봤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괜찮게 봤다,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왔다라고만 말해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성적표를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친구들은 어쨌든 축하한다며 나와 함께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내가 완전히 마음을 놓는 것은 수능 성적표를 받고 나서야 가능했다. 수능 당일 국어 가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했었기에 마음 한편은 가장 중요한 국어 성적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 남아있었다. 고로 수능 성적표를 받으러 경전철을 타고 시험에 가기까지 나는 수능 날과 비슷한 긴장을 다시 겪어야만 했다. 성적표를 인쇄할 수 있는 관련 부처에 들어가 행정실 직원 분께서 성적표를 인쇄해주시는 동안 계속 기도했다. 제발 가채점과 똑같이 나와주세요!            


   

 다행히 수능성적표에 나와있는 성적은 나의 가채점표와 완전히 똑같았다. 속으로 나는 탄성을 질렀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매우 길고 행복한 꿈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영영 깨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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