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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하 Sep 03. 2018

아주 독립적인 여자의 설거지력

내가 집에서 설거지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중장년의 남성들로 가득 찬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의 '설거지力'을 어필하려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은 생각 외로 다수여서 나는 진지하게 한동안 ‘내 얼굴이 싱크대로 보이나?’라는 고민을 했을 정도다. 자기들끼리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 않은데 다들 나만 보면 그런 이야기를 꺼내니 말이다. 


 특히 회식자리마다 내게 설거지 이야기를 하던 팀장이 있었다. 아마도 그는 처음 맞은 여성 부하직원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의 생각과 달리 설거지의 피해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른 살까지 엄마가 운영하는 부엌에서 나오는 밥을 먹고살았고 그 이후 꾸린 나의 부엌은 매우 작았다. 나에게 설거지가 별게 아닌데 남의 설거지는 오죽했을까.


 그의 어필은 갈수록 도를 지나쳐 처음에는 집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설거지를 했다가 나중에는 집안 요리의 90%를 담당할 정도로 무럭무럭 성장하였다. 그의 일방적 구애는 너무도 구차하고 허풍 투성이었다. 그의 가상 집안일 기행은 내가 "팀장님, 왜 이렇게 저만 보면 설거지 이야기를 하세요. 절 보면 설거지 생각밖에 안 나세요? 다른 남직원들과는 이런 이야기 안 하실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시대가 변화하나 보다 싶어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정말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할 것 같은 사람까지 그런 말을 하니 말이다. 그들의 설거지가 현실인지 뻥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설거지력이 자신의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중장년 남성들의 자각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설거지력을 어필하는 사람 옆에는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거나 야유를 퍼붓는 치, 혹은 남자도 설거지를 해야만 하는 시대의 도래에 반감을 표하는 치가 옵션으로 붙기 마련인데 이들에 비하면 훨씬 양반임엔 틀림없다.



누가 들으면 남이 먹은 그릇 설거지했단 줄 알겠네!


 설거지력 과시가 듣기 지겨워 이렇게 말하니 아저씨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이런 반응을 처음 맞닥뜨렸던 것이다. 곧 “우리 시대는 원래 그런 시대가 아닌데…”라는 변명이 뒤를 이었다. 칭찬을 기대했으나 면박을 당한 자의 항의였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과시에는 ‘스스로 먹은 그릇은 스스로 치운다.’는 기본적인 상식이 거세되어 있다. 그들에겐 자신이 먹은 식사에서 나온 설거지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희생이자 포용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원래 응당 담당해야 마땅한 여성인 내게 그 희생을 전시하며 윤리적인 우쭐감과 감사를 즐기는 것이다. 그야말로 양반들인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대로인데 세상이 변하고 상식이 변하여 이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양반일 수 없을 뿐이다. 


 사실 설거지는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해야 하는 수많은 가사노동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쉬운 일인 편이다.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집에 처음 방문한 손님도 도맡아 할 수 있을 정도의 루틴 한 일이라는 말이다. 요리처럼 미리 재료를 준비하거나 시간과 순서를 고려할 필요도 없고 청소처럼 집안 구석구석에 대한 지식도 필요 없다. 그저 한자리에 서서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아마 가사에 문외한인 중장년 남성들이나 자녀들이 가장 먼저 쉽게 입문하는 가사노동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기본적인 상식이 탑재되어있고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가사노동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정상적인 성인은 설거지력 따위를 과시할 리가 없다.


 설거지를 누가 하느냐가 뭐 그리 중요할까. 설거지 까짓 거 조금 미룬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바쁘면 다른 사람 손에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예전에는 필요에 의해서 가사노동을 여성이 전담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설거지력을 과시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상식이 아직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 맞닿아 있기를 바란다.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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