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게.
최근에 집을 싹 치웠어. 거금을 주고. 요즘 청년들의 쓰레기 집이 사회적 문제래. 쉬쉬해서 그렇지, 바깥에서 사회생활은 잘 하면서 집은 엉망인 사람들이 많다고. 사실 나도 그랬어. 아무도 몰랐지만. 치워야지 생각하다가도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이 년을 그러고 살다 결국 돈을 주고 사람을 불렀어. 이 년 동안 청소기 한 번 안 돌리고 살았어. 그 때 그 때 먹은 것만 치우면서. 나중에는 테이블을 펼 자리도 없어서 침대 위에서 먹어서 침대보에도 양념 자국들이 가득했어. 한심하지? 네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별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나대신 치워줬겠지. 넌 그런 사람이니까.
집을 치우면서 생각했어. 나는 이 물건들을 사는 데 돈을 엄청 썼는데 또 돈을 들이면서 이걸 버리는 구나. 정말 모순적이다. 하긴 내 인생에 모순적인 일이 한 둘인가.
나는 어쩌다 쓰레기 집에 살게 된 걸까. 방송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다양했어. 우울이 심해서. 사람에게 상처 받아서. 사회 생활하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느라 집에서 쓸 에너지가 남아있질 않아서. 모두 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유들. 그런가 싶다가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은 모습들이였어.
집을 치우기로 결심한 이유는 아는 선배의 집에 다녀와서 부터였어. 그 선배의 냉장고에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 예쁜 풍경이 담긴 엽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가 붙어있었어. 신기했어. 왜 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렇게 붙여두면 언제든지 편지를 볼 수 있구나. 생각날 때만 보는 게 아니라. 근데 문제는 내가 사는 집이 더러워도 너무 더러워서 편지 자체를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였어. 그래서 치우기로 결심한 거야.
그런데 이상하지? 결국 네가 준 편지는 찾지 못했어. 단 한 장도.
몇 년 전에 이직을 위해 찍은 증명사진이며 실비에 청구하려고 병원에서 받아 둔 서류들까지 찾았는데 네가 준 편지는 나오지 않더라. 사실 네가 편지를 준 적이 없었던 걸까?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변질되기 마련이니까. 네가 내게 해준 말들이 그냥 휘발되어버렸단 걸 믿기 싫어서 내가 편지를 받았다고 착각해버린 걸까.
어찌되었든 나는 이제 다시 식탁을 펴고 음식을 차려먹을 수 있어. 기분 좋게 깨끗한 화장실에서 씻을 수 있고,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어. 원하는 책을 꺼내 읽을 수도 있고, 집에서 운동도 할 수 있어. 가스 점검원이 오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집을 열어줄 수도 있겠지. 좁은 집이지만 충분해. 나에게 있어서 집은 가족과 함께 살 때에도, 혼자 살 때에도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제대로 살고 싶어.
이제는 본가에 다녀오는 날도 괜찮을 것 같아. 서울로 돌아가기만 하면 편안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엄마와 함께 있는 순간도 버틸만할 것 같아.
한동안 날이 많이 추워서 환기를 못했는데 내일은 조금이라도 하려고 해. 문득 생각난다. 너무 춥다고 하면 겨울은 추운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너의 단호함이 내심 서운했는데. 그러면서도 항상 핫팩을 데운 채로 들고 있다 손에 쥐어주는 모습이 좋아 속으로 웃곤 했지. 이제는 다 옛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