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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쌤 Nov 04. 2021

열정페이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

내 몸과 마음, 가정과 관계를 지키는 열정 한계선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 그날도 어김없이 밤 11시가 넘도록 내일 있을 행사를 홀로 준비하며 복사기 앞에서 수백 장의 종이들과 사투를 벌이던 날이다.


"수현 씨, 퇴근 안 해요?"


다른 부서에 계신 분께서 퇴근길에 불 켜진 우리 사무실 문을 빼꼼 열어 건네던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아마도 그날 밤, 나는 열정 한계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그토록 원하던 일, 여기만 붙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는데... 어쩌다가 몸과 마음, 가정과 관계가 다 무너져 만신창이가 된 느낌인 걸까. 취업 컨설팅을 받은 학생들이 입사 1~2년 차가 되면 이직이나 다른 직무를 고민하던 끝에 나를 찾아와 '참을 만큼 참았어요'라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고충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하나 같이 '열정페이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라는 풀리지 않는 질문과 싸우고 있었다.



열정페이

- 청년 구직자를 고용하면서 열정을 빌미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일

- 무급 또는 아주 적은 월급을 주면서 취업준비생을 착취하는 형태를 비꼬는 말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처음부터 '열정페이로 일해야지'하고 마음먹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 모두가 힘든 거 뻔히 아는데 조금 더 내가 배려하자, 희생하자 라는 선한 마음들이 어느새 탈진되어 '열정페이'라는 불편한 이름으로 불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열정페이에 대한 경계를 논한다면 내 몸과 마음, 가정과 관계, 즉 내 삶이 훼손되지 않는 선이라 말하고 싶다. 나도 자타공인 워커홀릭의 대명사였다.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필요한 존재,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밤낮없이 일에 매달렸고 혹여나 내 빈자리가 누군가에게 민폐는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 눈치를 살피며 끊임없이 시간과 재능, 열정을 조직에 충성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내 모습이 불안해 보였는지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돈의 노예, 사람의 노예, 일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마음 시린 충고들을 건넸다. 그럴수록 나는 청개구리처럼 일을 더 몰아붙였고 결국 복구 불가한 상태로 탈이 나버렸다. 내 나이 스물일곱, 한창 따뜻하고 아늑한 집을 꿈꾸며 끼얹던 열정이었는데 무언가 시작도 하기 전에 집을 다 태워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일터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미묘한 상황과 감정이 뒤섞인 곳이다. 그렇기에 더욱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용기와 단호함이 훈련되어야 한다. 현재 열정페이로 몸과 마음, 관계가 깨지고 있다면 이미 내 삶에 빨간 불이 들어온 상태이다. 이 열정을 더 불태울 것인지, 멈출 것인지, 계속 이 직장에 남을 것인지, 차선책을 구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필요 이상의 배려와 희생을 강요하는 그곳이 최악의 순간에도 나를 지켜줄까'에 대해 자문자답해 보길 바란다. 내면의 성숙을 위해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듯 사회생활에도 열정 객관화가 필요하다. 소개하는 두 가지 열정 객관화 방법을 통해 내 삶이 훼손되지 않도록 열정 한계선을 분명히 긋길 바란다.



열정 객관화 1단계

시간, 돈, 감정, 재능 등 스스로 허용 가능한 열정 한계선을 정하자.


마음이 약해져 나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과 결정에 조건을 달고,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연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딱 6시 30분까지만 도와주고 퇴근한다. 단, OO 상황일 때는 따지지 않고 도와주자!'라는 나와의 약속을 정하는 것이다. 만약 시간관리가 힘든 경우에는 내가 자리를 떠야 할 시간에 휴대폰 알람이 크게 울리도록 설정해 내가 더 이상 머무르기 곤란한 상황임을 인지시키자.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이 나의 열정 공간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정기적인 운동, 어학공부, 가족과의 식사 등과 같이 나를 위한 일들로 촘촘히 채워 놓는 것이다.


열정 객관화 2단계

나의 역할과 목표를 공식적인 문서로 수치화, 정량화, 체계화 하자.


열정 페이가 일어나는 상당수는 계약서, 업무지시서, 성과목표 설정서 등이 축소 또는 확대 해석할 수 있도록 쓰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정기간 단위로 열정 페이 탈출 타이밍을 만들어 놓길 추천한다. 예를 들어 추상적이고 행동 기준이 모호한 '이달 말까지'가 아니라 '11월 30일까지'처럼 누가 보아도 분쟁 소지가 없는 명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업무의 내용과 책임 영역에 대해서도 'XX 상황에서는 거절한다, 또는 1일 치 수당을 지급한다' 등의 조건을 반드시 넣길 바란다. 수개월, 수년간 열정 페이를 지불하고도 무책임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보다 어렵더라도 몇 분, 잠깐 단호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이 세상에 나의 건강과 감정, 가정과 대인관계에 탈이 나면서까지 지켜야 할 비즈니스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정성적, 정량적 방어에도 불구하고 필요 이상의 배려와 희생을 강요하는 곳이라면 진지하게 더 나은 선택을 찾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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