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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로 엄마의 오답노트 대신 작성하기

by 채운

나의 엄마는 오답만 말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내가 원하는 말은 절대 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날 따돌리는 친구들 때문에 울며 집에 왔을 때도, 결국 혼자가 되어 외롭게 학교생활을 할 즈음에도, 청소년 극단 오디션에 붙었을 때도, 내가 우울증에 걸려 차츰 삶에서 멀어져 갈때도. 우리 엄마는 정답을 말할 줄 몰랐다.


"그래도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엄마도 힘들어. 너까지 보태지 마", "니가 하고 싶은 건 어른 되서 대학 가면 해", "너는 왜 노력을 안하니? 마음을 고쳐 먹어봐."


어릴 땐 정말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누구보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엄마가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했다. 분명 엄마가 낳은 자식이 맞는데, 어쩜 저렇게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를 수가 있는지 답답한 마음이 쌓여 태산이 되었다. 나를 구렁텅이로 차 넣은 것들은 때 마다 바뀌었어도, 옆에서 나를 천천히 골병들 게 한 건 엄마의 수 많은 오답들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드라마에 나올 법한 못된 사람이냐? 단연코 아니었다. 주변에서 정 많기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고, 순하기로는 동네 제일이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엄마를 아는 사람들은 엄마를 대나무 숲으로 쓴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잘 못하고, 당신 부모님께는 또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모른다.


가난하게 자란 엄마는 현모양처가 꿈이라 현대맨 아빠를 선으로 만나, 만남을 열 번도 채우지 않고 결혼을 했다. 아빠는 그때 지갑이 터지도록 현금 다발을 채워 다녔는데, 그걸 보고 혹했다며 진담 반 농담 반 자조하는 엄마 말이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넉넉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으면 살림만 예쁘게 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세계여행도 시켜준다 약속했댔다. 그 때는 진심이었을.


회사에서 나와 개인 사업체를 차린 아빠는 사업 수완은 없는 사람이었다. 갈등에는 욕을 앞세우고 불의를 보면 주먹이 먼저 나가는 불같은 성미의 사람이었다. IMF인지 그 누구인지, 탓할 원인을 제대로 찾기도 전에 사업체를 잃고, 못 다 이룬 사업에만 집착하며, 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푼도 벌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아빠는 정말 미안하지만 '거짓말쟁이'였다.

"다음 주에 돼.", "다음 달에 돼.", "올해면 돼."

그 모든 말들이 진심이었대도, 그 진심은 이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짜가 되진 못했다.


무능한 남편은 아내를 사회로 내몰았다. 겁이 많던 엄마는 빨간펜 선생님으로, 작은 건설 회사 경리로, 마트 캐셔로, 부동산 웹사이트 관리직으로 이를 악문다. 남편을 바꿔 보겠다 십년 내내 싸우고 악을 쓰며 버둥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없는 살림에 아빠의 사업 뒷바라지까지 하며 결국 혼자의 힘으로 두 딸을 키워냈다. 그러나.. "나는 당장 너희랑 굶어죽을 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라고 말했던 엄마의 말처럼 정말 우리는 굶어죽지만 않고 나이만 겨우 채운 성인이 되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해 정말 잘 자라주고 싶었다. '나는 O씨(아빠의 성씨) 들의 노예'라는 말을 악에 바쳐 하고, '이 집에서 도망 가고 싶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엄마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학원 한 번 안다녀도 OO이는 공부 잘하잖아요."란 말을 듣던 유망한 초딩으로 어른까지 쭉 자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학창시절은 엄마의 오답이 쌓이듯 불운도 자꾸 쌓여갔다. 공부로 승부를 봤음 했던 엄마의 바램과 달리 피아노를 치고 무대에 오르는 게 더 좋은 청소년이 되었고, 하필 또 강남 8학군에, 빈부격차를 온몸으로 느끼며 예민한 기질은 더욱 발했다. "같이 놀려면 너도 돈 좀 들고 다녀.", "나도 전학 왔을 때 친구 없어서 힘들었어. 돈 없는 게 뭐? 너만 힘든 척 하지마." 친구들이 악의없이 했던 말을 고깝게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하고 순한데, 돈까지 없는 기지배가 더욱 만만한 아무개로 보이는 건, 겨우 사람이 되는 중인 중고딩들한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을 동물처럼 급을 나누고 인간의 따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그 야만의 시절에 더 깊은 날을 갖는 인간이 돼버렸다. 나는 감히 세상의 무언가가 되보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신, 공부는 더욱 뒷전으로 미뤄두고 방구석으로 숨고 만다.


그렇게 불덩이를 꼬박 꼬박 삼키며 어른이 된 나는,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중증 우울증 환자가 되어 있었다.


남에게 귀하게 대접 받지 못해도, 엄마 삶의 보상이 되지 못해도,

어른이 되면 남들처럼 훨훨 날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불안 장애와 공황 장애,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둔 채 병원과 집만 오가는 스물 넷이 돼버렸다.

그리고... 나는 하루 빨리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어른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슬프게도,

그 원인을 '착한 엄마'로 꼽았다.


나는 엄마의 보상이 되지 못한 '죄책감'때문에 병이 들었다고 했다. 매 순간의 불행에서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엄마를 불행에서 꺼내줄 수 없다는 무기력함.

나는 기어코 엄마의 딸로 사는 것을 잘못이라 느끼기에 이른다.


의사선생님은 오랜 치료 끝에 엄마와 나를 분리하라는 솔루션을 주셨다. 나에게 가득한 엄마를 지우고 보수적인 엄마가 유산처럼 물려준 모든 원칙과 규율을 깨길 바랬다.

나는 그 몸부림과 우여곡절 속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스물 일곱에 결혼을 해,

드디어 엄마로부터 온전히 떨어져 나가게 됐다.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선한 남자를 만나 죽음이 아니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평안'을,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찾은 것이다. 차로 40분을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에 남편과 단 둘이 살게 되며 겨우 제 3자의 눈으로 엄마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엄마와 나는 나의 결혼으로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을 이상적인 안전거리를 찾게 됐다.


서른 셋이 된 지금, 나의 엄마는 여전히 가난하다. 그리고 여전히 오답 자판기이다. 내가 돈이 없어서 이토록 서러운 건 아직도 엄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장마같던 우울은 그쳤지만, 엄마는 내 먹구름이 되기 십상이다. 칠순이 가까워져 가는 나이 든 엄마를, 부모를 책임 져야 한다는 생각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사치로 느껴지고, 하루 하루 행복할 일이 늘어갈 때마다 엄마의 불행이 겹쳐 보여 내 행복은 언제나 온전히 차지 않았다. 이렇게, 나만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엄마는 야속하게도 참 꾸준히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까지도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도대체 언제쯤 내 짐이 되지 않을꺼냐고, 도대체 노후는 어떻게 할꺼냐고, 무명 배우인 동생 이름을 빌려 겨우 얻은 전셋집은 훗날 어떡할거냐고. 엄마는 '엄마 아빠 노후 걱정해달라고 안해, 근데 엄마는 이게 최선이야'라며 수화기 너머로 읍소를 한다. 나는 못되게 속으로 되뇌인다. 제일 나쁜 건 '무능한 거'라고... 그리고 최고로 나쁜 건 '어설프게 사랑하는 거'라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해쳐 나가주길 바랬다. 더 독해지길 바랬고, 그 모든 설움과 고통을 삼켜주길 바랬다. 그래서 이기적으로 한번쯤은 멋지게 잘 살아주길 바랬다. 나는 그렇게 아직도 부모에게 바랬다. 그 무능과 애매함을 내가 물려받은 건 아닐까하는 생각과 함께 자책과 원망이 난무하던 지난 겨울이었다.


그러다 올 봄, 필연적으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만났다. 2년을 기다려왔던 임상춘 작가의 신작이었다. 한 회, 한 회 너무 보고 싶은 마음과, 너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매주 금요일, 한달에 걸친 정주행을 완료했다. 나는 그 거대한 신파 속에서 정답을 무수히 쏟아내는 갸륵한 이들과 마주한다.


부모인 애순과 관식은 내가 한이 돼 꿈까지 꾸는 모든 순간의 정답을 써내려 갔다. 멋진 부모는 저런 말을 하는구나. 가난해도 물려줄 수 있는 엄청난 유산이 있는 거구나. 부모의 사랑이 저렇게 퍼부어지면 사람이 저렇게 귀해지는 구나.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보는 내내 진이 빠지게 웃고 울며 쏟아내니, 화도 미움도 텅 하고 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16화 마지막 장면, 들판에서 노닐며 꿈을 꾸는 어린 애순과 관식을 한참을 보았다. 보고 또 보았다. 다음 날에는 그 장면이 자꾸 자꾸 떠올랐다.해맑은 애순이와 부족한게 많았던 나의 엄마가 새록 새록 겹쳐보였다. 마음을 좀먹던 미움이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니, 어리숙하고 어린 엄마가 보였다. 그래서 더욱 엉엉 울었다. 저 조그마한 사람이 관식이도 없이 딸 둘을 지켜내느라 동동거렸겠구나 싶어, 눈도 마음도 퉁퉁 불었다.


불어난 마음은 깊은 호수가 되어 또 언제든지 울 준비를 한다. 엄마의 성정을 많이도 닮은 나는 혼자서 잘 사는 건 죽어도 못할 듯 싶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난다. 받은 건 별로 없는데 줄 건 많을 앞으로가 억울해서인지, 약하고 겁많은 엄마가 겨우 지켜왔던 매 끼니가 이제야 생각이 난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린 엄마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가 해주기로 마음도 먹는다. 나는 엄마와 달리 애매하게 말고, 제대로 사랑할 준비도 한다.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내 모든 걸 내어줄 사랑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나를 고치느라 잊고 살았던 '능력있는 가녀장'이 다시 내 꿈이 된다. 이 죄책감과의 설욕전에선 꼭 원수를 갚아주리라.


올 봄, 드라마 속 흐드러진 유채꽃을 보며 다짐만 굳은 살처럼 딱딱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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