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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인 Suin Park Oct 15. 2024

그 많던 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나쁜 소리, 소음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마쓰야마성 앞마당 벤치에 앉으면 보이는 풍경. 이미지 출처: 저자 직접 촬영


일본 마쓰야마성 앞마당 벤치에 앉아 가만히 귀를 연다. 사박사박 모랫바닥 밟는 소리, 두런대는 일본말 소리, 저 멀리 아득한 축제 소리, 살랑 부는 바람에 나부껴 포드닥 대는 나뭇잎 소리, 까옥까옥 우짖는 이름 모를 새 소리.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굵은 모래 틈 굴곡진 지면 사이를 건장한 개미가 덜컹대며 오르내린다. 울타리 바깥으로 덩굴진 수풀 사이에 자라난 가느다란 들꽃이 팔랑인다. 나뭇가지 끝에서 흔들리는 작은 나뭇잎 위를 그보다는 백배 쯤 더 작은 곤충이 기어간다. 적당한 기온의 바람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친다. 언젠가는 희미해지고 말 이 감각들이 벌써 그립다. 그리고는 이내 행복감에 숙연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나조차도 많은 순간 귀를 틀어막는다. 내게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도구다. 그럼에도 나는 귀를 열어보자고 제안하려는 참이다. 우리는 소리 홍수 속에 산다. 그 소리들을 듣는 일은 세계를 인식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음, 들리지 않는 소리


이미지 출처: Bloomberg


우리가 소리 홍수 속에 산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수많은 소리가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세탁기, 밥솥, 에어컨 같은 대부분의 생활 기계에는 작동이 시작되거나 끝마침을 알리는 신호음이 탑재된다. 지하철 같은 교통수단에는 열차 진입음부터 진입 안내말, 환승음, 개찰구 카드 태그음까지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안내음과 신호음들이 가득하고, 도로와 길가는 교통소음, 때로는 공사 지역의 소음공해 같은 것들로 시끌시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에 이어폰을 꽂는 이유에는 이런 안내음이나 신호음이 불필요하다는 생각과 외부 소음을 차단하려는 의지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 같은 신호음이나 소음에만 둘러싸인 것은 아니다. 어딜 가나 음악이 있다. 카페, 백화점, 마트, 다양한 상품 판매장, 자동차 안 등 일상생활 속에서 머무는 공간에는 어김없이 음악이 있다. 거기에는 가벼운 재즈나 듣기 좋은 기악음악부터 팝, 인디음악, 일렉트로닉, 앰비언트 사운드까지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의 여러 장르 음악이 흐른다. 신호음이나 도시소음이나 혹은 음악이나, 이들 소리에는 한 가지 일관성이 있다. 듣지 않는 소리라는 점이다.


‘소리’이면서 ‘듣지 않는다’고 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사실이다. 위에 열거한 경우를 비롯해 우리 주변엔 수많은 소리가 있지만 대체로 우리는 그것을 듣지 않는다. 이를테면 카페에서 친구와 대화하면서 친구의 말보다 음악에서 들리는 복잡한 소리 요소에 귀 기울이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도시 소음을 흥미롭게 듣는 일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소음에 귀를 연 예술가


이미지 출처: coruba


그러나 ‘들리지 않는’ ‘소리’는 대체로 듣지 않기로 결심한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주변의 소리에 귀를 열기로 결심하면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듣기 싫은 소음일 경우 그 변화는 더 크다. 얼마 전 모임 ‘오작’1)이 개최한 세미나 “소음의 정치학과 음악사 비판”에는 소음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자신을 조각가라고 소개한 한 참여자가 공유한 일화는 소음에 관한 핵심을 관통하는 경험이었다. 그는 층간소음을 주제로 설치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층간소음을 다루려다 보니 소음에 관한 정의가 필요했다고 술회했다. 조각가는 나름의 정의를 내리게 된 경위를 밝히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아침마다 집 앞을 지나는 야채 장수 트럭의 시끄러운 방송 소리에 늘 불쾌하게 잠에서 깨곤 한다. 그 방송 소리는 조각가에게 듣기 싫은 소리이자 소음이다. 그러던 중 조각가는 자신에게 소음인 그 방송을 자신의 소음 작업에 활용해 보겠다고 생각한다. 소음에 귀를 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듣기 싫고 불쾌감을 일으키던 소리가, 무려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이 일화는 소음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야채 장수가 방송하는 소리 자체에는 물리적으로 어떤 변화도 없지만, 소리를 향한 조각가의 달라진 태도는 야채 장수의 소리를 ‘소음’에서 ‘창작의 재료’로 바꾼다. 어제까지 소음이던 것이 오늘은 기다려지는 소리가 된다. 이 일화는 여러 물음을 일으킨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듣지 않기로 한 소리는?’, ‘나는, 우리 사회는 왜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할까?’, ‘그 소리에 귀를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같은.


존 케이지의 《거실 음악》 연주 장면 캡처.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Jacob Barrie’


소음에 귀를 연 예술가가 이 조각가만은 아니다. 역사 속 수많은 음악가가 소음에 귀를 기울였고 그런 관심은 음악을 채우는 소리의 세계를 넓혔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소음의 반대편에 있는 소리로 인식된다. 소음이 특정 음높이를 갖지 않거나 시끄러운 소리, 그래서 무질서한 상태의 소리를 의미한다면, 음악은 소리 재료를 일정한 규칙과 질서에 따라 일관적이고 통일성 있는 무언가로 만들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음악 바깥에 있는 소음을 음악 안으로 끌고 들어온 시도들은 음악에 관한 기존의 인식을 허문다. 예컨대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의 《거실 음악》(Living room music, 1940)은 집안에서 사용되는 여러 사물들이 악기로 활용되고, 그럼으로써 일상의 소리가 음악화된다. 우리나라 작곡가 김택수의 《국민학교 판타지》(2018)에는 9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국민체조 음악’부터 어릴 적 학교에서 들었던 리코더 소리, 풍금 소리,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들이 흐릿해져 조각난 기억처럼 파편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 모임 ‘오작’은 음악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을 발간한다. 2003년 창간되어 연 2회 발간되는 이 음악비평지는 ‘흐름과 진단’, ‘작가와 작품’, ‘창작의 현장’ 세 개 주제 아래 특히 국내 창작 음악 씬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경이로운 듣기



소음을 비롯한 주변의 소리에 귀를 여는 것이 예술가들 고유의 일일 리 만무하다. 마쓰야마성 앞마당에서 모든 감각을 열어젖힌 나의 일화 역시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여행지 같은 고유한 환경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잗다란 가랑비가 내리던 며칠 전, 가로수가 잘 정돈된 길을 산책하며 경청한 도시의 소리는 더 이상 소음이 아니라 재미난 소리 복합체였다. 오른쪽에서는 대로변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운행 소음이 베이스처럼 낮게 깔리고, 그 소리 위로는 왼쪽 강변 너머 고가차도를 오가는 차량의 소리가 희미하게 겹쳐진다. 빼앰빼앰 강변에 서식하는 벌레들 우는 소리, 저벅저벅 젖은 모랫바닥을 걷는 나의 발걸음 소리, 토독토독 우산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 마주 오는 행인들의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말소리까지. 귀에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빼자 세상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리로 빼곡했다.


주변 환경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자연이나 도시 같은 생태 환경 소리에 귀를 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열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경청하겠다는 태도는 나 자신의 소리로도 향해야 한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 소리를 듣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바람직하고 옳다고 여기는지, 어떤 상황을 어려워하는지. 아무리 자신의 소리라도 귀를 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명상이 달리 명상이 아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리를 경청하지 못하면 타인의 소리를 듣는 일도 쉬이 일어나지 못한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나아가 내가 처한 세계를 인식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앞에서 술회한 “들리지 않는 소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은 틀렸다. 들리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기로 한 그 결정이 어떤 존재를 소거한다. 어떤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결정은 그 소리를 소음으로 만든다. 소음은 침묵 되어야 하는 소리, 나아가서는 제거하는 것이 마땅한 소리로 합의된다. ‘마땅’하다는 합의에는 윤리적 판단이 따르고, 그 윤리 앞에서 소음은 비윤리적이자 나쁜 존재로, 극단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조각가의 경험이 불러일으킨 물음이 유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듣지 않기로 한 소리는? 나는, 우리 사회는 왜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할까? 그 소리에 귀를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참고문헌  
• 정경영,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곰, 2021.
• ‘소음이란 무엇일까요?’ (2020. 12. 31.) https://youtu.be/X7Xd6Cr9x3E?si=ZRerhAZ7SEZ3Dp59
• 박총, 『듣기의 말들』, 유유, 2023.
• 존 케이지(John Cage), 《거실 음악》(Living room music, 1940) https://youtu.be/Dr-Wt8Nd6bI?si=rTECV1kDoI3ArCgC
• 김택수, 《국민학교 판타지》(2018) https://youtu.be/36Sm-fgletU?si=VzTv5Od5GboJV6vk&t=1449



ANTIEGG

Senior Editor_박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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