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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인 Suin Park Nov 04. 2024

클래식 음악회는 왜 엄숙한가

청취 문화의 역사가 알려주는 클래식 음악회의 비밀

궁정 안에도 교회가 있었으니 거기서도 교회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궁정에서는 귀족의 여흥을 위한 음악회도 열렸다. 흔히 ‘살롱 음악’이라고 하는 소규모 실내음악이다. 궁정 음악회에서는 예배 때 연주하지 않는 세속 음악, 이를테면 악기로 연주하는 춤 음악을 연주하거나, 사랑에 관한 가사를 노래했다. 주로 음악 후원자인 귀족의 입맛에 맞는 음악이 그때그때 연주되었고, 귀족이 직접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궁정 음악회의 청중은 귀족이었다. 궁정에서의 음악 듣기는 놀이이자 여흥이었다.

음악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중에서도 소위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는, 서양예술음악을 들으러 콘서트홀에 가봤다면, 객석 안에 감도는 경건한 공기를 한 번쯤 느껴봤음 직하다. 음악회가 시작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공간에 우리 몸을 맞춘다. 휴대폰은 진동으로 바꾸고, 기침은 최대한 삼가고, 악장과 악장 사이 박수는 치지 않고, 옆 친구와 잡담하지 않는다. 바르게 세운 허리와 다소곳하게 모은 손. 수많은 시선은 일제히 무대를 향한다. 유독 클래식 음악의 콘서트홀 문화는 여러 약속과 질서, 규칙들로 점철되어 있다. 왜일까? 언제부터일까? 이 글은 클래식 음악의 청취 문화를 살펴 이런 물음을 생각해 보려는 시도다.




원래 그런 건 아니었다


유럽에서 아주 오랫동안 음악의 무대는 교회, 혹은 궁정이었다. 교회에서는 주로 사제와 성가대가 노래했고 청중은 회중이었다. 사제와 성가대는 대체로 그날의 성경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가사, 또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특정 절기와 관계있는 가사를 노래했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 예배는 거룩한 장소에서 성스러운 소리를 듣는 자리였다.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높은 첨탑과 우아한 아치로 덮인 장엄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찬연한 빛과 예배당 안을 가득 울리는 성스러운 노래는 신의 비장한 숭고함 앞에 한없이 작고 연약한 신도들을 무릎 꿇렸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교회에서 음악을 듣는 경험은 종교적 체험과 다르지 않았다.


궁정 음악회, 이미지 출처: Centre de Musique Baroque Versailles

궁정 안에도 교회가 있었으니 거기서도 교회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궁정에서는 귀족의 여흥을 위한 음악회도 열렸다. 흔히 ‘살롱 음악’이라고 하는 소규모 실내음악이다. 궁정 음악회에서는 예배 때 연주하지 않는 세속 음악, 이를테면 악기로 연주하는 춤 음악을 연주하거나, 사랑에 관한 가사를 노래했다. 주로 음악 후원자인 귀족의 입맛에 맞는 음악이 그때그때 연주되었고, 귀족이 직접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궁정 음악회의 청중은 귀족이었다. 궁정에서의 음악 듣기는 놀이이자 여흥이었다.




뒤죽박죽 음악회장


다양한 목적으로 공공음악회장에 모인 사람들, 이미지 출처: Fine Art America


이러한 환경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16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공공음악회장이 생겨나면서다. 교회와 궁정의 후원으로 작동하던 기존의 음악 생태계는 이제 입장권을 판매해 수익을 일으키는 자본주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음악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은 새로운 음악회장 광경을 연출했다. 음악회장에는 정말로 음악을 감상하려는 관객도 일부 있었지만, 음악 감상은 부수적일 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예쁜 여자를 꾀려는 남자들, 그 남자들에게 예뻐 보이려고 한껏 치장한 여자들도 있었고, 개를 데리고 음악회장을 찾는 관객, 그저 마실 나온 사람, 애써 모객하지 않고 음악회에 모인 관객을 노린 광대들까지. 그러니 이 시기 콘서트홀은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여든 뒤죽박죽 청중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베토벤으로 돌아가기(Back to Beethoven)*

*) 니콜라스 쿡 『음악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의 두 번째 장 제목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 클래식 음악의 콘서트홀이 처음부터 그렇게 경건하고 엄숙한 장소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특정 규칙이나 질서에서 자유로운 곳에 가까웠는지 모른다. 지금과 같은 콘서트홀 문화가 생겨난 것은 베토벤 이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서양예술음악의 문화는 무려 200여 년 전 베토벤 시대에 확립된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음악회장에 모인 19세기의 청중들이 리스트(Franz Liszt)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음악 감상 문화가 베토벤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은 그 바로 윗세대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주의 음악 양식의 대표 작곡가로 꼽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선배 작곡가들의 음악 위에서 새로운 혁신을 이룬다. 그 혁신이란, 음악의 구성 원리와 관계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음악이 귀에 착 감기는 선율을 들려준다면, 베토벤은 선율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아이디어, 모티브(motive)라고도 부르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산만한 청취에서 집중적 청취로


음악 용어로서의 ‘동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말 ‘동기(動機)’와 다르지 않다. 음악에서 동기란 음악이 진행되어 나갈 추진력을 만들어 내는 최소한의 단위다. 혹 여전히 ‘동기’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을 떠올려 보라. ‘따따따딴~’하고 장엄하게 울리는 첫 네 음이 바로 이 음악의 동기다. 《운명》에서는 이 작은 동기가 맥락을 달리하며 음악 전체에서 끊임없이 들려온다. “《운명》은 오로지 ‘따따따딴~’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이 네 개 음은 마치 세포가 모여 인체를 이루는 듯 전체 음악을 형상화한다.


베토벤 얼굴과 그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의 첫 다섯 마디, 이미지 출처: The Classic Review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고? 네 개 음들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 (여러분이 아는 그 ‘반짝반짝 작은 별’이 맞다)을 들을 때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작은 별’에서는 그 자체로 완결된 귀여운 선율이 쉼 없이 들려오는 것과 달리 베토벤의 ‘따따따딴’은 앞뒤 맥락 없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모차르트 음악은 좀 듣다가 친구와 잠시 잡담하고 돌아와 다시 듣더라도 여전히 좋은 선율이 들려온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야만, 다시 말해 하나의 문학작품을 읽는 듯 열중해서 들어야만 그 나름의 음악적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엄숙한 콘서트홀 문화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 있다. 베토벤 시대 이후로 콘서트홀에서는 다른 사람의 몰입을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에티켓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음악회장 객석의 조명을 어둡게 유지하는 것 또한 음악 듣는 데 딴짓하지 말라는 무언의 언명이다.


*) 원래 제목은 《’아,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선율에 의한 열 두 개의 변주》(12 Variations On ‘Ah, Vous Dirai-Je Maman’ in C Major K.265)다.




지금 우리의 듣기 문화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콘서트홀 문화는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확립되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음악회장 예절 탓에, 한편에선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교양인 흉내를 내려고 무턱대고 공연장 에티켓을 줄줄이 외는 일도 일어난다. 객석 안에서 끝내 붙들지 못한 기침이 삐져나오고 말았을 때, 주변에서 불쾌한 눈초리를 받는 흔한 상황은 공연장 에티켓을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교양인” 문화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연장 예절이 무엇인지 꿰는 것보다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에릭 사티, 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이런 허세를 견디지 못한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는 자기 음악을 제발 집중해서 듣지 말라는 이상한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음악을 주인공처럼 듣지 말고, 그저 방 안에 놓인 식탁이나 옷장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설치되어 있는 ‘가구’처럼 즐겨 달란 것. 음악을 연주하면서 ‘이 음악을 듣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사티의 요구는 괴변 같은 구석이 있지만, 사실은 지금 시대 우리에겐 이미 일상이나 다름없다. 배경 음악으로 또는 신호음으로, 음악은 지하철, 카페, 엘리베이터, 세탁기, 에어컨 등 언제, 어디서든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 모든 음악을 콘서트홀에서 듣듯이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 시대 음악은 “들리는 가구”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는다. 이런 환경에서는 음악을, 필연적으로, ‘가구’처럼 듣는다.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듯 있는 듯, 무엇인가를 하면서 일종의 배경 음악처럼 산만하게. 이 같은 현대의 산만한 청취 문화를 되새길 때, 온전히 음악에만 몰입하도록 초대하는 콘서트홀 청취 문화는 값지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복잡하게, 빠르게, 부주의하게, 파편적으로 보내고 마는 우리의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독특한 문화라서다. 그러니 베토벤 시대에 확립된 콘서트홀 문화는 그저 오래된 옛날의 유물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200여 년이 흐른 지금, 넘쳐나는 음악 홍수 시대에 베토벤 시대와는 또 다른 가치를 제안한다. 우리가 베토벤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빼어난 음악성을 넘어, 이렇듯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 청취 문화를 남겼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문헌   
• 와타나베 히로시, 『청중의 탄생』, 강, 2006.
• 정경영,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곰, 2021.
• 니콜라스 쿡, 『음악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곰, 2016.



ANTIEGG

Senior Editor_박수인

https://antiegg.kr/author/suin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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