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게티의 메트로놈과 연주의 문제
당신이 생각하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감정을 후벼파는 아름다운 선율? 경쾌한 리듬과 에너제틱한 비트로 흥을 돋우는 소리? 작곡가의 영감에서 피어오른 소리 창작물? 음악을 거론하면서 떠올리는 대부분의 인상은 대체로 서구의 근대 이후 확립된 생각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른바 탈근대(postmodern) 시기로 간주되는 20세기 이후 몇몇 음악가들의 작업은 음악을 향한 기존의 고정된 기대를 허문다.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의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Poème symphonique, 1962)는 그런 여러 실험들 중 하나였다. 이 글은 리게티의 이 작품을 감상하며, 살피며, 생각하며, 음악에 관한 기대, 그중에서도 ‘연주’에 관해 다시 물으려는 시도다.
리게티가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은 1962년. 플럭서스* 운동에 관심을 보였던 시기다. ”교향시”는 그가 작곡한 세 개의 플럭서스 작품 중 하나다. 플럭서스는 리게티의 전체 음악 경향과 함께 살필 때 잠시 스친 호기심 정도로 간주된다. 그러나 리게티의 마지막 플럭서스 작품인 이 곡이 그가 ‘복합리듬’**을 실험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플럭서스 운동은 리게티 음악에서 호기심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고 할 만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이 글이 주목하듯, 규범이라고 생각되는 음악 연주에 관한 몇몇 상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교향시“를 연주하는 데는 메트로놈 100개와 열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메트로놈 열 대를 작동시켜야 한다. 무대에는 보면대와 의자 대신 100개의 메트로놈이 놓인다. 각각의 메트로놈은 일정한 시간 동안 고유한 빠르기로 소리 내도록 설정된다. 한 사람이 지시하면 무대 위 열 사람은 가능한 한 동시에 메트로놈을 작동시킨다. 똑딱이는 메트로놈 소리는 점차 빽빽해지고 어느 순간 하나의 소리 더미가 되어 빼곡하게 울린다. 각 메트로놈은 지정된 시간이 다하면 서서히 멈춘다. 따라서 빼곡하게 울리던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차차 잦아들고, 그 잦아든 시간에는 빽빽한 소리 더미가 아니라 각각의 메트로놈 소리를 듣게 된다. 최후의 메트로놈이 작동을 멈추면 작품은 종결된다.
*) 플럭서스(fluxus): 196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네오 아방가르드 예술의 일종으로, 비디오 아트 작가 백남준이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복합리듬(polyrhythm): 서로 다른 박절과 강세를 가진 복잡한 리듬을 동시에 울리는 것. 정교하고 세심하게 조직화되지만 그 소리 결과물은 무작위적으로 들릴 수 있다. 리게티는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에서 복합리듬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실험했다.
“교향시”에서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상식적으로 악기라고 할 만한 것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악기 연주를 보조하던 박자기, 곧 메트로놈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오른다. 기실 메트로놈은 음악이 지정된 속도보다 빨라지거나 느려지지 않도록 돕는 보조 수단이다. 이 작품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관객이 메트로놈을 무대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메트로놈은 관객보다 연주자와 더 친하고 무대보다 연습실과 더 가까운 매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관계는 전복된다. 음악의 보조 수단은 여기서 핵심 악기가 된다. 보조 수단으로서의 메트로놈은 음악의,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도록 ‘돕는’ 도구다. 메트로놈은 연주자의 몸이 원하는 시간과 속도에 적응하는 순간 그 쓰임을 다한다. 그러니 연습실에는 있지만, 무대에서는 계획적으로 소거되는 것이 바로 메트로놈 소리다. 그런데 무대 아래 연습 노동을 상징하는 바로 그 메트로놈 소리가 “교향시”에서는 무대 위 음악 자체가 된다. 메트로놈이 악기가 된다는 사실은 음악의 보조 수단이 악기가 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메트로놈은 무대 아래 숨겨진 연주자의 시간을 관객에게 정면화한다. 메트로놈 소리는 무대에 드러나지 않던 연습실, 숨겨진 연주자의 시간, 그 숙련의 과정 같은 것으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한편 “교향시”는 정반대 사실을 폭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열 명의 연주자가 각각 열 개의 메트로놈 바늘을 튕기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작동되는 이 작품은 연주와 연습 노동에 관한 기존의 상식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일반적으로 무대 위 전문 연주자의 연주는 수백, 수천 시간의 연습 노동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하나의 음악을 연주자 스스로 만족할 만큼, 그래서 관객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만큼 연주하기까지는 커다란 신체적 노력과 무수한 시간이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스트나 파가니니 같은 역사 속 비르투오소*)는 마치 신에 들린 듯한 굉장한 기교를 뽐내며 천재적 연주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교향시”에서는 메트로놈의 바늘을 튕길 수만 있다면 그 누구든 연주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는 메트로놈이 그 스스로 악기이자 연주자인지도 모른다. 일단 작동되기만 하면, 메트로놈은 지속적으로 소리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스스로 연주를 멈추기까지 한다.
*) 비르투오소: 뛰어난 연주력으로 몹시 복잡한 기교를 탁월하게 선보이는 연주의 대가를 일컫는 이탈리아 말이다.
리게티의 100개의 메트로놈을 위한 “교향시”는 1963년 네덜란드 힐베르숨 시청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여러 실험 작품들이 그렇듯 이 음악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초연은 이틀 후 텔레비전에서 녹화 방영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네덜란드 방송국은 기존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축구 경기를 내보냈다. 이 같은 방송국의 판단은 어쩌면 ‘이딴 게 연주야?’ 하는 물음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리게티는 이 작품이 소리로 된 비평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리게티의 말을 새길 때 “교향시”가 1960년대 당시의 현대음악 상황에 관해 무언가 물으려는 것이었다면, 이 글은 그것이 지금 내게 묻는 물음, 곧 연주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이 ‘고된 연습 노동을 제거하고서는 연주를 거론하기 어렵다’거나 ‘누구나 연주자가 될 수 있다’ 같은 답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리게티의 물음이 내게 연주에 관한 질문을 일으켰듯, 이 글의 쓰임은 독자를 또 다른 질문으로 불러들이는 일에 있을 테니.
[참고 문헌]
・Eric Drott, “Ligeti in Fluxus,” The Journal of Musicology, 21/2, 2004.
・이희경, 『리게티, 횡단의 음악』, 예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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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ior Editor_박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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