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박수인


‘시절 인연’이라고 말했다. 그런 것이 있지 않느냐고. 그렇다. 모든 시절의 인연들과 언제고 함께이리라는

기대는 순진하다.


어려운 관계 앞에서 쩔쩔대기만 했었다. 아닌 척 공격해 와도 잘 몰랐다, 그가 날 뭉개고 있음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날 사랑하는 네 마음이구나 하고 내가 내게 속아주었다. 더 이상 속아주는 게 어려워지자 마침내 알아차렸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난이었음을. 그러자 난 울어버렸다. 그 앞에서 쩔쩔매는, 상처받는, 답답하고 분한 내가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그 울음엔 ‘내 마음은 그게 아냐.’ 하는 억울함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속아줄 수 없으므로 그와의 이별이 도래할 것임을 직시한 슬퍼함도 있었다.


난 이제 그가 아니라 내 옆에 섰다. 그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로 했다. 내 옆에 서자 선명해졌다. 나는 아팠고, 괴로웠고, 슬펐고, 그렇지만 더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나에게 솔직하지 않을 것이고, 그는 나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것. 또 하나의 시절 인연이 그렇게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