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들은 촉감처럼 다가온다. 오늘의 글에는 아무런 통일성이 없다. 그럴거면 왜 쓴거냐고 묻는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 몇시간씩 멈췄고, 누워서 뒹굴었고, 많은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편의 개떡같은 글이 완성됐는데, 개떡이라는게 실제로 존재하는건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Chat GTP는 개떡이 멍멍이 자식이라는 욕과 동의어라는 말도안되는 피드백을 건내온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작은 파편들은 하나의 과녁으로 모이지 않기로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반장으로서,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수업시간에 점점더 시끄러워지는 친구들의 이름을 쓰다가, 결국은 지워달라, 못지워준다, 얼마줄래, 못준다, 어쩐다 하는 대화가 떠듦을 오히려 고조시키기에 이르던 날처럼, 오늘의 내 반장은 우리반을 조용히 시키기는 커녕 잡담에 일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야생동물 보호소에서 보호하던 독수리 한마리를 마침내 자연으로 돌려보내기위해 방사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이 기름을 떠나듯 떠나버리는 독수들처럼 오늘 하루는 도망쳐 달아난다.
소리들은 촉감처럼 다가온다는 문장으로 새벽 4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잠을 설치는건 소리도 소리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게 분명하다. 공사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깊이 잠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낯선 변화들이 시작되고, 그런 변화들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아직은 확실치 않을때, 그런 불확실성이 불안으로 다가올때에는 글을 쓴다. 오늘은 글도 답이 아닌것이다. 어제의 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기도 한다. 이제 자판이 아니라 망치와 전동드라이버를 잡는게 답일런지.
소리들은 촉감처럼 다가온다. 청각적 자극은 공기중의 떨림에 불과한데도, 마치 직접 내 피부를 건드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리는 그렇게 생생하게 꿈속의 나를 흔들어 현실로 데려온다. 아이유의 밤편지 가사속 시간적 배경이 언제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새벽 네시에 깰 수밖에 없는 억울함이나 분노 따위의 감정들이나, 그렇게 나를 깨우는 개별적인 소리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대게는 답이 없다. 억울함과 분노에 머물러 있는것만큼 힘든일도 없다. 새벽 네시의 소리 하나하나에 대해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 역시 행정력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럴때는 세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살아있는 세계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시끄럽다는 단어에 이미 부정적 감정의 뉘앙스가 스며있다. 그런 뉘앙스 이면에 자리잡은건 이 세계가 쥐죽은듯 고요해야만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왜 세계는 한밤중에 매너를 지키지 않는가. 세계는 왜 정숙하지 않는가. 왜 항상 침묵을 깨는가. 떠드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넣을 칠판도, 그 이름을 확인할 선생님도 이제는 사라진 이 시점에, 세상은 왜 자꾸만 뒤에서 달그락 달그락 장난을 치며 딴짓을 하는가. 왜 반장의 뜻대로 학급이 돌아가지 않는가.
세계는 늘 공사중이다. 어딘가에서 허물어지는 한편, 다른 곳에서는 지어지는 중이다.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조차도 사실은 버티고 있다고 하는게 정확한 말일 것이다. 중력을 딛고 서있는 사람이 그렇고, 사람이 서있는 건물이 그렇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버티고선 두 다리가 말해주는 것, 제각기 흩어지려는 길고 굵은 각목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끌어당기는 나사못이 말해주는 것, 벌써부터 지저귀기 시작하는 창밖의 새들을 지탱하는 나뭇가지가 말해주는 것들이다.
하나로 모이지 않는 하루 속에서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들을 하나로 모으기를 포기한건 전체를 보기 위해서다. 시간이 부족해서였는지, 전체를 명확히 정의하지 않아서였는지, 열심히 하지 않아서였는지, 왜 전체를 보지 못해왔던건지 고민하면서 눈을 감았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렇게 꿈의 세계로 끌고들어간 질문에 대한 답이다. 맛있는 엄마표 김장김치가 생각나는 하루다. 한포기를 반으로 자르는 상상. 그리고 꽁지를 잘라내 쌀밥의 이웃 접시에 옯겨 담는 상상. 자유를 얻은 크고 작은 배추입사귀들과 같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