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증과 모성애는 별개다_4
아기를 만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꽤나 평탄한 임신기간을 보냈다. 입덧은 무난하게 지나갔고 아기가 뱃속에 있는 동안 산부인과에서 주의를 받은 적도 한번 없었다. 부지런히 노 키즈존 도장깨기를 하고 다닐 정도로 활발하게 돌아다녔고, 여행도 다녀오는 등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마지막 시간들을 즐겼다. 운동을 꾸준하게 한 덕분에 허리 통증은 크지 않았다. 임신으로 발생하는 모든 불편함은 다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임신이 끝나갈 즈음에도 둘째 계획까지 하면서 여유로움을 유지했다. 정말로 임신기간이 재미있었다. 몸의 변화들이 낯설지만 신비로웠다.
그런 나에게도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아주 잘 유지해오던 몸무게 그래프는 예정일 3주를 남기자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증권이었다면 성공적인 투자로 기록될 만큼..) 9개월 차에 진입했을 때부터 어딜 가든 사람들이 '곧 출산이신가 봐요~' 할 정도로 배가 유난히 컸던지라 예정일과 다가올수록 배는 정말 남산만 해졌다. SNS에 사진을 올릴 때마다 배 크기에 대한 DM이 쏟아졌다. 덕분에 새하얀 배에는 하나 둘 새빨간 튼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배는 물풍선처럼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팬티라인 부분의 아랫배가 속절없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튼살이란 건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는데, 관리를 아무리 해도 아기가 밀어내는 속도는 따라잡지 못했다.
두 번째 시련은 빨갛게 터진 뱃가죽 위에 일자로 그어진 수술 자국. 겪어보지 않으면 쉽게 공감할 수 없겠지만 아기를 낳은 지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거울 속 자신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쉽게 떨칠 수 없는 시련임에 분명하다. (아기가 소중한 것만큼 내 몸도 소중하다. 아기가 예쁜 건 예쁜 거고 내 상처가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두 개의 감정은 철저하게 별개다.)
세 번째 시련은 12시간의 진통으로 상해버린 몸 상태였다. 참고로, 진통을 겪으며 자연분만을 하는 경우는 일시불로, 진통이 오기 전에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는 경우는 할부로 고통을 받는다고들 이야기한다. 나의 경우는 일시불과 할부를 동시에 긁어버린 고통 빚더미의 상태였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고통 청구서의 총액은 남들의 두배를 기록했고 회복기간 또한 곱절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약해둔 조리원에 빈방이 나지 않아 불편한 병원에서 2일을 더 보냈는데, 불쑥 찾아온 젖몸살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골반 덕분에 감옥에 갇혀 고문받는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서 7일을 보낸 뒤 도착한 조리원은 꽤 값이 나가는 호텔처럼 룸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망가진 몸으로 도착한 천국은 흔히 생각하는 호캉스와는 전혀 달랐다. 요양원에 도착한 노파가 된 느낌이랄까..
천국이라 일컫는 조리원 생활도 2주가 지나니 좀 쑤시고 힘든 곳이었다. 코로나 덕분에 외출은 불가했고 자연바람이 그리울 정도로 갑갑함이 증폭되어 갔다. 매일 받는 마사지 덕분에 몸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하루에 옷을 두세 번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식은땀 범벅이 되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고, 나는 산후우울증이라는 무서운 놈을 등에 업고 무장해제가 가능한 내 집 안방에 누울 수 있었다. 그땐 몰랐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우울감이라는 놈이 같이 누워있을 줄은..
집에 와서야 내 몸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산책을 나가기 위해 옷장을 뒤적거리며 맞는 옷을 찾는 동안 내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임신기간 동안 입었던 옷만 경우 맞는 지경이었다. 커다란 배 뒤에 몰래 숨어 덕지덕지 붙어있던 군살들이 이제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고 패잔병처럼 상처가 가득 남겨진 채 찌그러진 배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이었을까? 나는 우울증이라는 놈을 입고 산책에 나섰던 거 같다. 대충 걸쳐 입은 옷만큼이나 내 마음도 대충 챙겨져서 강한 햇볕 아래 서있으니 모든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출산 직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는 상태였고, 10분의 산책도 버거울 만큼 나는 에너지 고갈상태였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딱 맞았고, 마음의 면역력은 몸의 건강과도 맞닿아 있음이 분명했다. 면역력이 깨져버린 내 마음은 순식간에 우울증이란 침략자에게 점령당했다.
'왜 나만?'
그 무렵 내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왜 나만?'이라는 의문뿐이었다. 아기는 건강했고, 모든 가족들은 행복해했다. 그 속에 '나만' 힘들었다. 남편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육아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본인도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부모가 되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야 하는지 화가 났다. 모두가 기뻐하는 그 상황들 속에서 억지웃음도 지어 보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타인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공허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엄마가 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왜 아무도 이런 투정은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만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나는 약한 사람이었던 걸까? 나는 모성애가 없는 사람이었던 걸까?' 하는 걱정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기를 만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에는 총량이 있나?'
임신기간이 평온했기에 결국은 출산과 회복의 과정에서 그 힘듦을 한 번에 몰아서 받는 게 아니었을까? 자식이라는 귀한 선물을 맨입으로 얻는다는 것이 너무 쉬워 보여서 신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 게 분명했다. 고통의 총량을 채워야만 아기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시험에 통과해야만 했다. 이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작고 반짝이는 아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신이시여 저는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며 자격을 부여받아야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사실 인간은 약 30년 정도의 수명으로 설계되었는데 무궁한 과학의 발전으로 너무 길게 살게 된 게 아닐까? 아니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기를 낳은 엄마의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리 없었다. 아기를 낳고 모체의 영양분을 모두 아기에게 물려주는 것이 엄마의 본분이다. 아기가 혼자서 생활할 수 있어질 때까지는 보호해야 했으므로 출산 후 딱 10년 정도만 더 살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출산 했었으므로 30대에 죽으면 딱 알맞은 나이가 아니었을런지) 아기는 잔인할 만큼 이기적이다. 엄마의 모든 영양분을 총동원해서 성장한다. 엄마가 섭취하는 영양분이 부족하면 뼈를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꺼내어 쓴다.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와도 엄마는 몸의 일부를 재료 삼아 모유를 만든다. 정교하게 빗어진 아기의 몸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몸에서 수많은 뼛조각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뿐이겠나? 아기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영양소와 면역세포 또한 모두 엄마의 것이었다. 지방을 태우는 다이어트 만으로도 몸이 망가지는 마당에 사람을 만들어 내보냈으니 엄마가 아픈 건 당연했다. 역시, 엄마가 될 운명인 여자의 몸은 오래 살 수 없게 설계된 게 분명했다. 젠장.
아기를 낳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을 보며 생각할 것이다. '역시,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좋겠어'. 혹시 당신이 그랬다면 남은 글들도 꼭 읽어주길 바란다. 어둠의 끝자락을 딛고 올라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아기를 보며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참으로 신비로운 경험이다. 자식이 생긴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