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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ul 09. 2023

첫 번째 편지

더 이상 애쓰면 살지 않아

들어가며

친구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서간체 형식으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어릴 적 벗에게 쓰는 편지라 생각하니, 훨씬 편안하고 솔직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독자분들도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가 보낸 편지라고 생각하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시길 바랍니다. 

   


#1 첫 번째 편지


친구야, 오랜만에 이렇게 불러본다. 


외국에서 일하고 아이를 키우며 잘 지내냐고 네가 물어본 날, 유난히도 아침 산책을 길게 했어. 너에게 어떤 답장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라. 그리고 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미국 생활 12년 차. 그 사이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회사와 가정 모두 만족스러워. 무엇보다 현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아.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 아니라 가장 편안한 옷을 입고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달까.  


안부를 묻는 고마운 메시지 덕분에 ‘지금의 나’를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어. 예기치 않게 길어진 내 이야기를 답장으로 써볼까 해. 사실 우리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부를 나누지 못했잖아. 뉴욕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보다 지금의 행복을 가능케 한 나의 소신과 기준을 너에게 말하고 싶어. 


하루 중 네가 가장 기다리고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야? 나는 아이들과 자기 전 누워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린 그 시간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 낮과는 다르게 밤에는 아이들도 차분해지고 에너지가 달라져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더라고. 종일 밖에서 방전되었던 에너지가 딸 (만 9세)과의 대화로 충전되기도 하지. 주로 우리의 대화는 그녀의 질문에서 시작되는데,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써볼게. 


“엄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뭐야? Mom, what is your biggest fear?” 

“엄마는 지금 하는 일이 어렸을 때도 하고 싶은 일이었어? Is the job you have now the job you wanted when you were younger?” 

“엄마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이제 무슨 일을 더 해보고 싶어? If you wanted another job, what would you pick?” 

“엄마, 우리가 가끔 귀찮아?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든 일이야? Mommy, are we annoying sometimes? Is raising a kid really hard?”


아이의 질문은 나한테 기차표 같아. 그녀의 물음에 답하면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거든. 목적지도 모른 채 기차에 올라타면 어느새 난 아이와 내가 오랫동안 피하고 싶었던 과거의 어떤 지점에 가 있기도 하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20년 뒤 나의 모습을 기차 창문 너머로 함께 보고 있기도 해. 방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지만 매일 밤 우린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한참 동안 깊게 들여다봤어. 숨김없이 나누었던 나의 두려움, 기쁨, 꿈, 소망, 그리고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이야기들로 아이들이 나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라는 타이틀 밖에 있는 ‘나’라는 사람으로.


생각해 보니 집에서 뿐 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난 항상 질문을 받는 사람이구나. 데이터 분석가/과학자는 결국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을 데이터를 바탕으로 찾는 사람이거든. 넷플릭스 데이터 과학자는 네가 가장 좋아할 만한 컨텐츠를 찾아야 하고, 우버에서 일한다면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루트를 제안하는 모델을 만들 테고,  카드회사에서는 도용사기 (fraud)가 의심되는 거래를 예측하고 있을 거야. 이쯤에서 궁금하지? 도대체 뉴욕시청에 근무하는 데이터 과학자들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내가 일터에서 받았던 질문을 나눠볼게.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어. 


18세에 보육원에서 퇴소한 보호종결아동 중 향 후 노숙인 보호 시설에 입소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아동을 예측 모델로 찾아낼 수 있는가?


몇 주에 거쳐 만든 예측모델로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보호종결아동들의 공통된 특성을 파악했어. 예상했던 대로 보육원 생활 전 부모와 함께 노숙인 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가장 취약한 그룹이었어. 2023년 1월 27일 기준으로 뉴욕시에는 약 7만 명의 홈리스가 있고, 이 중 2만 3천 명은 어린이야. 믿어지니?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이 도시 어느 골목엔 부모와 노숙인 쉘터에서 살다 결국 부모와 헤어져 보육원에 입소하고, 보호종결아동이 되어 세상에 홀로 나왔다가 다시 홈리스 시설로 가는 몇 백명의 아이가 존재해. 


반면, 예상하지 못한 특성도 있었어. 여자 청소년들이 남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예측이었지. 사회 복지 프로그램 성과는 대부분 여성에게서 더 성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결과에 의문이 들었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고자 노숙인 시설을 운영하는 팀에게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현장의 생각을 여쭤봤어. 데이터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현장 분들은 알고 계시더라. 많은 보호종결 여자청소년들이 미혼모가 되어 노숙인 쉘터에 입소한다는 거야. 내 커리어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믿기 어려운 분석이었어. 하지만 이 위험요인을 바탕으로 보호종결아동 자립 서비스를 새롭게 디자인하는데 조언을 줄 수 있었어. 


비슷한 주제의 분석 요청을 받을 때마다, 나는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질문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내 자긍심의 큰 원천은 도움이 절실한 이들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총기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 같아.


다음 편지에서는 나의 일 얘기를 더 담아볼게. 지속가능 한 커리어와 일터를 찾아가는 나의 여정이랄까? 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사기업에 근무하다가 미국에서 공공정책 대학원을 다니고 지금의 직장을 갖게 되기까지 돌이켜 보니 나름 나만의 길잡이 별 (North Star)이  있었어. 나를 중심으로 가져오기 위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 내가 찾은 답을 가지고 다음 주에 올게.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수진 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레퍼

런서의 글>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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