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넘겼는데도 현역으로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Alessandra Ferri). 최고기온 40도의 폭염을 뚫고 도쿄에 간 이유 중 하나였다. 페리의 무대는 일본 공연예술진흥회(NBS)가 3년 마다 무대에 올리는 세계 발레 축제(the World Ballet Festival)의 프로그램A와 B에 포함.
지난 7월 31일과 8월 1일 도쿄에서 관람한 프로그램A. 여기에서 페리는 크리스토퍼 휠든(Sir Christopher Wheeldon)이 2005년 안무한 작품, '애프터 더 레인(After the Rain)'의 파드되(pas de deux, 2인무)로 무대를 부드럽게 장악했다.
'지젤'로 열연하는 페리. 바리시니코프가 알브레히트. 출처 페리 본인 인스타그램
파트너는 무려 로베르토 볼레(Roberto Bolle). 볼레 역시 1975년 생으로 베테랑 급이지만, 1963년 생인 페리에겐 띠동갑 연하 무용수 후배. 이 둘이 선보인 2인무엔 서로에 대한 믿음, 예술가로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깊이 묻어났다.
출처 페리 인스타그램
'애프터 더 레인' 리허설 중인 페리. 출처 페리 인스타그램
이 작품을 굳이 고른 이유는 뭘까. NBS의 프로그램북엔 작품 해설은 간략히 되어 있지만 상세 내용은 더 찾아봐야 했다. 그래서 추가로 찾아본 뉴욕시티발레단(NYCB)과 샌프란시스코발레단의 홈페이지. 휠든이 이 작품을 만든 건 NYCB를 위해서였다. 두 발레단의 설명을 압축해 윤문하면 아래.
'애프터 더 레인'의 파드되는 작품의 두 번째 파트. 작품의 일부라고는 해도, 그 자체만으로도 탁월한 독립성을 담보한다. 8분 가량의 짧은 작품이지만, 인생의 모든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
프로그램북 속 알레산드라 페리. 아름답다. by Sujiney
여성 무용수는 옅은 분홍색의 레오타드만을 입고 머리는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채, 극강의 여성성을 보여준다. 남성 무용수는 반면, 힘이나 활력을 과시함으로써 남성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호를 하고 보살피는 입장으로서 역할을 한다. 음악(곡명 'Spiegel im Spiegel')의 섬세함에 대한 답을 주듯, 두 무용수는 최면과 같은 상태의 일체감으로 부드러움과 예민함으로 하나가 된다."
어찌보면 알레산드로 페리와 로베르토 볼레의 무대를 위해선 완벽한 작품 아닐까. 페리의 무대를 보고 감복해서 그가 예전에 했던 인터뷰들을 찾아봤는데, 그 중 특히 Full of Dance라는 곳에 기록된 아래의 말을 보고 든 생각. 한국어 번역은 살짝 윤문을 했다.
“As an artist, I’m always naked. When you are on stage or before a camera, you must have the courage to be completely naked. This makes an artist really vulnerable, but also used to extreme situations, and, in a paradoxical way, gives us great strength.”
"예술가로서 나는 항상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무대 위에서건, 카메라 앞에 있건, 완벽히 벌거벗은 상태로 있을 용기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지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술가는 정말이지 연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크나큰 힘을 갖게 됩니다. 극한의 상황에 익숙해지기 때문이지요." Alessandra Ferri, prima ballerina assoluta
프로그램북 속 페리 소개. by Sujiney
베이지색에 가까운 옅은 핑크색 캐미솔 레오타드만 입고, 천슈즈를 신은 채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대에 선 페리는 61세라고 믿기 힘들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어떤 장식도 걸치지 않은 채 관객에게 보인 것. 자신의 모습뿐 아니라, 자신의 춤까지도 그대로 관객에게 보이기에, 공연예술, 그중에서도 무용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페리에겐 누드 핑크의 이 레오타드 이상의 것은 불필요했다. 그의 몸 자체가 최고의 의상이었으니. 7월 31일과 8월 1일, 도쿄 분카가이칸(문화회관)의 관객들은 그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Brava' 'Bravi'를 외쳤다. 그가 십수시간을 날아와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가, 환호와 감사의 대상이어서다.
17회 세계발레축제, 잊지 못할거야. by Sujiney
성공만을 맛보며 살아온 무용수일 것 같지만, 페리 역시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었다. 물론 무용수로서는 그는 타고난 재능과 끝없는 노력 덕에 탄탄대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영국 로열발레단에서 1980~1984년,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서 1985~2007년, 모국인 이탈리아의 라스칼라 극장 발레단에서 1992~2007년 수석으로 무대에 오르며 역사를 써내려간다. 로열발레단에선 19세라는 나이로 당시 최연소 수석이 됐고, 케네스 맥밀란 경부터 롤랑 프티 등, 당대 최고의 안무가들의 뮤즈가 된다.
로열발레단에서 ABT로 넘어간 건 다름 아닌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무용수의 권유. 바리시니코프는 페리와 함께 영화 '지젤(Giselle)'을 촬영하기도 했다. '지젤' 작품을 올리는 발레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이 영화에서 실제 지젤로 출연하는 인물이 페리.
바리시니코프와 '지젤' 열연 중인 페리. 출처 본인 인스타그램
하지만 2007년, 그는 만 나이 44세에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그는 "두 아이 등 가족에 전념하기 위해"라는 요지의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는 2013년 복귀를 선언했다. 이후 2016년 유니버설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위해 내한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와 경쟁하는 느낌이 싫었고,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은퇴를 결정했다. (중략) 은퇴 후 6년간 춤을 추지 않았는데, 곧바로 느꼈다. 행복하지 않다고. 내가 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사이 그는 이혼이라는 아픔도 겪었다. 영국 텔레그래프와 인터뷰에선 이렇게 말했다.
"이혼은 갑자기 들이닥쳤고, 춤이 나를 구했다."
그는 사진작가인 파브리지오 페리와 이혼했다. 여러 기사를 종합하면 남편이 그를 떠났다는 게 정설. 성인 페리(Ferri)가 같은 건, 우연이라고. 둘 사이엔 딸이 두 명. 딸 둘 모두 엄마와 살았다.
페리의 복귀 직후 올린 작품 중엔 2013년 '윗층의 피아노(The Piano Upstairs)'도 있다. 이혼을 결심한 부부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페리가 이 작품을 고른 건 의미심장하다.
17회 도쿄 세계발레축제 공연장 로비. by Sujiney
페리의 진짜 무대는 어찌보면 복귀부터가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전엔 천재적 발레리나였으나, 그의 시즌2는 발레라는 바운더리를 넘어 확장의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어서다. 그 역시 브리티시 보그(British Vogue)와의 아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윤문과 요약을 거쳤음을 밝혀둔다.
"튀튀를 입고 고전 발레만을 추던 때는 지났어요. 이제 저는 더 이상 '백조의 호수' 전막에 나가지 않지요.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 있고, 연극과 발레, 음악의 다양한 만남을 만들어 가고 있어요. (중략) 무대 위에서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인간이죠. 그렇기에 더욱 친밀한 무대를 만들 수 있어요. 관객과 진정으로 친밀하게 다가서는 것이니까요."
같은 인터뷰에서, 페리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I don't know what makes an artist different from a technician. I think it's the courage of being yourself. You need courage to do that in life. And it happens the same on stage."
"예술가와 테크니션의 차이는 아마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인생에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해요.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 그러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수없이 담금질해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생에 닥치는 다단한 파고에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흔적이 페리의 춤엔 녹아 있었다. 그렇기에, 그렇게나 아름다운 것이겠지.
페리의 무대를 직관한 2024년 여름. 기억해두자.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페리의 아래 말로 마무리. 역시 British Vogue에서 발췌. 보그가 붙인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을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의 답변은 모든 여성들이 읽어야 하는 금과옥조'라고 붙였다.
"스무살만 아름답다고는 믿지 않아요. 아름다움은 삶 그 자체에 있습니다. 변화를 겪어내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우리가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 것을 알아가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죠. 만약 외적인 것에서만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물론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안함이죠.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방식과 내용을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브리티시 보그 기사 https://www.vogue.co.uk/article/alessandra-ferri-interview
뉴욕타임스 기사 Turning a Retirement Into a Hiatus https://www.nytimes.com/2013/12/08/arts/music/alessandra-ferri-returns-to-the-stage-in-cheri.html?smid=nytcore-android-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