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주인공을 꿈꾼다. 무대 위에서도 주역을 맡고픈 건 인지상정. 이 글을 쓰는 2024년 가을, 한창 화제인 방송 '스테이지 파이터'에서도 발레리노들은 주역을 따내기 위해 기꺼이 피 땀 눈물 범벅이 된다.
모두가 '퍼스트'라 불리는 계급에 들어가야 솔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방송의 설정. 제작자들이 '계급 전쟁'이라고 정의 내린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군무의 계급은 '언더'라고 불린다. 실제 현실 발레계에서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니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솔로이니까.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출처 및 저작권 국립발레단
하지만, 상상해본다. 군무 없는 전막 발레.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할까. 백조의 칼군무가 없는 '백조의 호수', 세기디야 군무의 흥겨움이 없는 '돈키호테', 애절한 쉐이즈 군무가 없는 '라 바야데르'라니. 상상조차 어렵다.
무대는 생각보다 넓은 곳이다. 그 공간감을 주역만으로 채우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고전발레의 알파와 오메가,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마리우스 프티파가 고전발레에서 각종 기하학적인 대열의 군무를 고안한 건 이유가 있다.
아름다움의 정식. 출처 및 저작권 국립발레단, 윤식스포토
그래서일까. 유명 작품의 군무를 배우는 기회는 언제나 감사하다. 발레 교육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세종대의 비학위 발레 과정인 세종 발레 디플로마에서 '지젤' 1막의 군무, '돈키호테' 1막의 세기디야(aka 세기딜리야, Seguidilla) 군무를 배우는 게 세상 행복한 까닭. 지젤과 알브레히트, 키트리와 바질에 관객의 눈은 고정되어 있겠지만, 주역의 무대도 군무가 있어야 완벽해진다.
국립발레단 백스테이지. 출처 및 저작권 국립발레단, 윤식스포토
다음주,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에 특별 출연하는 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단 에뚜왈, 즉 수석무용수도 나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군무를 하면서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군무라는 건 나 혼자 잘하거나 못해선 안 된다. 세종 발레 디플로마에서 동료들끼리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와, 군무이니까 더 열심히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나 혼자 잘하거나 나 혼자 망하는 솔로와는 달리, 군무는 함께 잘해야 하는 거니까. 동료들과의 호흡과 동선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군무의 어려움이다.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연습 끝에 잘 맞으면 특유의 희열이 있는 것이기도 하고.
세종 발레 디플로마 무용실. By Sujiney
비너스 발레학원에서 연습 중인 조지 발란신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의 '꽃의 왈츠' 역시 그래서 어렵고도 보람차다. 사실, 모든 군무 연습이 그러하듯, 완벽은 불완벽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나온다. 중요한 건, 완벽을 위해 서로가 한 마음이 되는 것. 발레의 아름다움은 잔인하기에, 모든 걸 다 바쳐도 모자라다. 그러하기에 더 겸손하게 더 기본에 충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최선이 모이면 시너지는 엄청나다. 지난해 본진 발레조아 '세레나데' 공연에서 이미 맛보았던 그 희열.
그 희열은, 감히 말하건대, 느끼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느끼는 사람은 적지 않을까. 무대를 위해 여러 명이 함께 최선을 다해서 최고를 지향한다는 경험은 특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군무가 힘들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이유이겠지.
혼자 빛나는 것도 의미있지만 함께 빛나본 경험은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힘들지만, 함께 빛나보자.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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