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도 인생도, 결국은 중심이다. 스스로의 무게로 중력을 이용해 중심을 잡고, 잡았던 중심을 옮기고, 옮긴 자리에서 다시 중심을 잡는 것.중심의 축을 선명히 잡고 있어야 돌고 뛰고 날 수 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도, 내 중심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중심을 잘 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중심을 옮겨야할 때 결연히 옮기는 사람. 그렇게 찾아낸 새로운 중심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베프, 발레 슈즈. By Sujiney
그래서일까. 내 인생의 소중한 중심이 될 연희동 작은 단독주택의 이름을 짓는 건 어렵고도 쉬웠다.
찬찬히 지어지고 있는 우리 집. 공사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By Sujiney
처음엔 별별 이름을 다 생각했더랬다.
그러다 처음 마음이 갔던 후보. 브라마 솔레. Brama Sole.
이탈리아어로 bramare 동경하다 sole 태양. 태양을 동경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미 알고 계셨다면,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아래서'를 보신 분일 가능성 99.999%.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내게 다정한 구원이 되어준 승연 승원 언니 덕에 알게 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을 찾아 읽으며 나는 절망을 희망으로 치환했다.
그 희망을 현실로 바꿔내는 체력과 멘탈은, 말해 뭐해, 발레 덕에 얻었다.
포스터.
영화의 짧은 줄거리.
상상하지 못했던 인생의 복병을 만나 모든 것을 잃은 프랜시스. 친구가 건네준 투스카니행 비행기 티켓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우연히 한 집을 만나는 데, 지어진 지 200년이 넘는 그 집을 프랜시스는 덜컥 매입해버린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그 집을 개조하면서 인생을 개조하는 프랜시스. 새로운 삶과 사랑을 결국 찾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사진은 아래. 지금도 내 회사 노트북과 태블릿의 바탕화면이다. 첫 사진은 절망에 찌든 프랜시스가 브라마 솔레에 홀리듯 들어가는 뒷모습. 두번째 사진은 브라마 솔레를 재단장한 뒤 손님을 맞는 환한 희망의 프랜시스.
절망에서,
희망으로. 영화 공식 스틸컷s
설계를 맡아주신 모도건축 소장님은 "주택 이름을 지으면 네이버 및 다음 등 지도에 등록도 할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셨었다. 가슴 뛰는 일. 그렇기에 더 잘 짓고 싶었다.
그런데 네이버 지도를 찾아보니 이미 브라마 솔레가 있는 것 아닌가. 카페였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일종의 신호인 것. 이게 아니고 다른 걸 찾아보라는, 신이 보낸 신호.
작은 집인데 커보이네. 이래서 사진은 믿으면 안됨. By Sujiney
그러다 문득, 발레 클래스에서 깨달았다. 최시몬 선생님의 "발레에서 중요한 건 중심이에요, 중심을 잡고 옮기는 것이죠"라는 말을 들으며. 시몬쌤은 이 이야기를 수백번도 더 해주셨지만, 그날따라 마음에 더 확 와닿았다.
물론 시몬쌤만 중심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다.
모든 발레 선생님들께서 결국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신다. 중심 이야기는 주로 축다리, 발바닥, 쁠리에, 코어, 등잡기 등으로 강조하신다.
중심을 잡는 것도 어려운 데 옮겨서 다시 잡는 것까지도 끊임없이 해내야 하는 것. 그걸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름답게 음악에 맞춰서 해내기에 프로 무용수들이 엮어내는 일련의 움직임이 예술로 승화하는 것.
세종 발레 디플로마 클래스가 이뤄지는, 세종대 용덕관 무용실. By Sujiney
발레 클래스의 거울 속 나는 여전히 중심을 잡았다가도 무너지고, 중심을 옮기려다 낑낑대고, 왼쪽으로 중심을 결연히 옮겨야 하는데도 어정쩡하게 가운데에 갖고 있다가 흔들거리고 만다.
하지만, 부끄럽진 않다. 실패는 시도의 증거이니까. 실패에 침울해져서 포기를 하는 거야말로 부끄러운 거.
이렇게 분연히 쓰는 것 치고는 매번이 실패의 연속이라서 민망하긴 하지만, 뭐 어때, 그냥 계속 꾸준히 즐겁게 해나가는 거다.
어디에서?
나의 연희동 '중심의 집'에서.
영어로는 'The House of Balance' 라고 지으려 한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중심'이라는 건 내 집짓기 계획에서 꽤 오랜 기간 화두였다. 일본 건축가 아베 츠토무(阿部勤) '중심이 있는 집(中心のある家)'이란 집에서도 영감을 받았으니까.
이 집은 영화 '나비잠' 덕에 알게 됐다. 관련 블로그 글은 아래 링크. 네이버에서 '연희동 기자리나'를 검색하셔도 된다. https://m.blog.naver.com/writer_ballet_home/223344317703
아베 건축가에겐 외람될 수 있지만, 나의 집은 '중심이 있는 집'에는 그치지 않으려 한다. 중심을 잡고, 중심이 있지만, 또 그 중심을 언제든 유연하게 그리고 결연하게 옮기기도 하는 집.
여러 과정을 거쳐 올 겨울이면 완공을 앞뒀다. 이 집엔 지금까지의 내가 녹아있다. 이 집을 짓기 위해 가슴이 무너진 일도 두 번. 그러나 프랜시스가 브라마 솔레로 일어났듯, 나도 중심의 집으로 일어나려 한다. 조심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