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고 싶다면 바닥을 쳐라

82번째 브런치 by SJ 발라레 인생(20)

by Sujiney

인생의 바닥에 있다고 느낀 적, 있으신지.


지금 그렇다면 심심한 위로를,

그런 적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온다, 그 시간)

미리 위로를 드리는 바이다.


아니지. 남을 위로할 자격이나 있나 모르겠다.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다녀왔다가 간신히 다시 바닥으로 돌아온 참이니.


그래서일까. 지난 토요일 본진 발레조아에서 정훈일 선생님이 이렇게 외치셨을 때 머릿속이 일순 하얘졌다.


“바닥과 하나가 되세요! 바닥을 그냥 대충 쓸고만 가면 아~무 소용없어요. 발로 바닥을 느끼고 힘껏 밀어내야 합니다!”


역시, 발레는 인생의 다른 이름인가.


최근 서희 ABT 수석무용수님 인터뷰 장소에서 마주친, 바닥위의 슈즈. 어느 전공생이 놓고간 꿈 한 짝. By SJ


바닥에 있다고 그 바닥을 외면하고 무시하면 그 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닥을 벗어나려면 먼저 바닥을 인지해야 한다.


그다음, 바닥을 있는 힘껏 느껴서 바닥에서 힘을 받아 날아올라야 한다.




그동안 나는, 바닥에 있으면서도 바닥을 모르고, 아니, 애써 모르려 했다. 결국 바닥에 스스로를 묶어놓고 있었다. 스스로를 바닥에 결박해 놓고, 날아오르겠다는 건 언감생심. 그 바닥에 영원히 묻힐 준비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바닥’은 발레에서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존재.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과 정혜연 선생님도,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도, 최시몬 선생님도, 너무도 그리운 여름 선생님과 연주 선생님도, 바닥을 항상 강조하셨다. 발레 다이어리를 뒤져보니 이런 선생님들의 말씀에 밑줄을 여러 번 쳐놓았다.


“바닥에 축다리를 완전히 꽂아요.”

“바닥을 밀어내서 그 차오르는 힘으로 점프를 뛰고 턴을 도는 거예요.”

“바닥을 느껴요.”


국립발레단의 최근 '지젤' 공연 백스테이지. 바닥의 마킹이 인상적. 불러주신 현아팀장님 최고❤️ By SJ


뿐만 아니다. 다다다음 생 정도에 출전을 꿈꾸는, 전 세계 발레 꿈나무들이 경합하는 로잔 발레 콩쿠르에서도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Use the floor!” “Feel the floor!”

바닥을 잘 활용하는 무용수의 턴이 더 안정적이고, 점프의 높이도 인상적이라는 말과 함께.


취미리노 배진수 교수가 쓴 ‘물리의 쁠리에’(플로어웍스)엔 이런 요지의 말이 있으니.

쁠리에는 바닥과 내가 추는 파드되(pas de deux, 2인무)”

결국, 바닥이 중요하다는 말.


플리에는 무릎을 그냥 구부리는 게 아니라고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강조하신다.

“배꼽을 올려보라”부터 “내려갈수록 키는 커지세요” “정수리 위에 1cm만 더 키워보세요” 등 다양한 표현을 쓰시지만 뜻은 하나.

바닥을 누를수록 내 몸은 한없이 위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기민도 올해 8월 인터뷰에서 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플리에로 바닥과의 기본을 다져놓은 뒤에야 넥스트 레벨로 갈 수 있다. 바닥과 친해진 뒤, 그 바닥을 벗 삼아 훼떼 32회전을 돌고, 중력을 거스르는 카브리올 점프를 뛰고 그랑제떼로 날아오르는 것. 할렐루야.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앗살라 알라이쿰.




발(레미)치광이인 이유는 많지만 요즘 특히 생각한다. 발레를 하는 동안만큼은 내가 오롯이 나일수 있다. 나와 거울과 바닥과 선생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지금, 여기(now/here)에 100%를 줄 수 있는 것.


아무도 내게 특종이며 기획이며 보고서를 쪼지 않고,

누가누가 특파원에 지명될 것인가를 놓고 밤낮을 안 가리는 경쟁도 잠시 잊고,

단톡방 상사의 말에 빛의 속도로 “넵”이라 답하는가를 두고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내가 발레를 배우는 동안에도 나의 경쟁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보다 회사 경쟁에서 앞서 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나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을 공산도 크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래도


다.


김기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인터뷰 중, 완벽한 데미포인. 매순간 바닥을 제대로 느끼는 찐 무용수. Copyright SJ


발치광이가 되기 전엔 안 그랬더랬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 욕심을 부렸다. 그 욕심에 무리했고 인생의 여러 톱니바퀴가 어긋났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발레를 정면으로 다시 마주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연습실의 바닥을 느끼며 인생의 바닥을 생각한다.


바닥을 알고

바닥과 친구가 되고

바닥의 힘으로

바닥을 치고

날아오르자.


어찌 보면

바닥은 축복이다.


By SJ



※커버 사진은 '나란히 발레' 다큐멘터리의 발레 무용수 꿈나무.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