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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사람A Oct 03. 2016

비오는 날은 라면

음식에 담긴 맛 향 온도 색감 기억

비오는 날은 라면이지, 노오란 냄비에 꼬들꼬들하게 끓여서 턱샘을 자극하는 신김치랑 한입 탁 먹었을 때, "앗뜨거!!"하고 다시 뱉더라도 라면은 모락모락 김날때 후후 불어 먹는 게 제맛. 호로록 호로록. 아 먹고 싶다.


초등학생 때, 토요일 하교길에 비가 내리면 동네에서 애들이랑 뛰어놀긴 틀렸단 생각에 아쉬우면서도 묘하게 들떴다.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뒹굴뒹굴 티비 재방송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특히나 점심 장사로 바쁜 엄마가 대충 끓여서(계란탁 파송송 그런 거 없음) 방으로 넣어준 냄비라면까지 합세하면 실로 완벽한 주말이었다.


라멘은 불의 세기가 중요하다. 일찍이 이경규 아저씨는 끓는 면을 들었다놨다 하면서, 공기반 열기반으로 익히는 조리법을 강조한 바 있지만, 난 그보다 중요한 건 화력이라 믿는다. 면발을 꼬들꼬들하게 적당히 잘 익히려면 센불에 확 잽싸게 익히는 게 좋은데 가정용 가스렌치 화력으론 부족하다. 업소용 화구로 센불에 확 끓여야 면도 탄력있고, 국물이 격하게 끓어오르면서 냄비 양옆으로 살짝 들러붙어 불맛이 난다. 양은냄비와 업소용 화덕의 콜라보레이션이랄까. 그래서인지 그 시절 식당을 하던 엄마가 끓여준 라면 맛을 지금 우리집 인덕션으로는 백날 끓여도 흉내낼 수가 없다.


라면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


지난 여름 후쿠오카였다. 미식의 도시라고 해서 엄청 기대를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24배까지 매운맛을 조절할 수 있는 라멘집은 초장없이 회 못 먹고 김치없이 라면 잘 못먹는 나에게 치명적 유혹이었다. 나마비루로도 일식의 달달느끼함이 청산되지 않던 후쿠오카 사일차 밤, 나는 정말이지 간절한 마음으로 그 라멘집을 찾았다. 무더위 속을 헤매며 이십분을 걸었고, 에어컨 없는 대기실에서 일곱테이블의 웨이팅을 기다리면서도 불쾌지수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배는 그닥 고프지 않았지만, 살려고, 타향살이에 지친 오장육부를 달래려고 먹었던 그 매운맛 라멘. 그 라멘 맛은 아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아~~~~~쉣!! 쉣쉣스ㅞㅅ!! 진짜 드럽게 맛이 없었다. 불과 몇 분 전의 나처럼 잔뜩 들떠서 줄서 있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그냥 집에 가, 집에가서 고추가루 퍼먹어, 국수에 물 말아서 고춧가루 풀면 이 맛이야"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맛 없죠?"


한국인이었다. 엄마 또래의 중년 여성이었고, 그 라멘집 알바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 벌이가 시원찮아서 대박집으로 소문난 그 집에 알바로 잠입, 비법을 빼돌려 장사를 해볼 심산이었는데, 생각보다 라멘맛이 너무 별로라서 멘붕이라고 내 귀에 속사포로 고백했다. 아마도 한 젓가락 먹고 조용히 쌍욕을 날리던 내 입모양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린 니혼진들 사이에서 니혼진들의 미각 후짐에 대해 은밀하게 위대하게 뒷담화를 나눴다.


오늘 불쑥 그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분명 우리 엄마 또래였는데, 대박집 비법을 알아내서 일본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던 그 눈빛만큼은 20대 같았다. 그곳에 있던 어느 알바생보다 뜨겁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에너지를 느꼈다. 한국 사람이라서 더 챙겨주는 거라며 굳이 배부르다는 나에게 주인 몰래 수육 한사발을 퍼다주셨던 아주머니,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꼭 매운맛 1도 모르는 일본시장에 제대로 된 마운맛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비오는날의추억 #라면 #추억은맛있어 #라면은더맛있어 #안맛있는게뭐냐


P.S: 매운 맛 라면이 땡길 땐 고춧가루보다 청량고추를 넣습니다. 반개면 충분합니다. 맛있게 눈물 나는 맛.  

후쿠오카 여행에서 찍은 내 사진. 인스타에 올렸을 뿐인데 구글에서 일본 매운 라면 검색하니 뜨더라는. 내가 #프로먹스타 였다니.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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