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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 없는 사람 Nov 13. 2020

땅콩샌드는 역시 '국희'지

국희(MBC, 1999)

이미 늙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늙기 싫어 항상 트렌드를 향해 촉수를 곤두세우고 산다(그러면서 옛날 드라마 칼럼을 쓰는 아이러니). 하지만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고를 땐 역시 ‘신상’보다는 옛것이 좋다. ‘허니버터칩’처럼 반짝 인기를 끄는 과자가 나오면 궁금증에 구매해보지만 꾸준히 손길이 가는 건 새우깡, 자갈치 같은 과자인 것처럼. 느닷없이 옛날 과자 타령을 하는 건 1999년 방영한 드라마 <국희> 때문이다.


이따금 '국희 땅콩샌드'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국희>가 떠오른다. '국희 땅콩샌드'는 원래부터 크라운제과에서 판매되던 과자인데, 드라마 공식 후원을 맡은 데다 인기까지 얻으면서 국희란 이름을 붙였다. 극중 ‘동그라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국희 땅콩샌드’는 동그란 비스킷 사이에 고소한 땅콩크림을 넣은 단순한 형태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스테디셀러다. 그리고 드라마 <국희> 또한 아직도 내 또래들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작품이다. 휴, 요즘 애들은 왜 땅콩샌드에 국희란 이름이 붙은 건지 모르겠지.



어린 신영과 어린 국희. 어린 국희 역의 박지미의 똘망똘망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국희>의 스토리라인은 단순하다. 국희의 아버지 민영재(정동환)는 독립운동을 위해 엄마 잃은 갓난 딸 국희(김혜수, 아역 박지미)와 전재산을 친구 송주태(박영규)에게 맡기고 떠난다. 이 설정부터 비극이 깃들어 있잖아?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큰돈이라니. 국희는 주태의 아내(김영자)와 딸 신영(정선경, 아역 김초연)에게 치이며 구박데기로 지내지만 똑부러지고 당차게 자란다.


해방을 앞두고 영재가 돌아오지만 재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송주태가 친구 영재의 암살을 사주하며 국희는 아버지를 잃는다. 이후 ‘태화당’ 장태화(전무송) 밑에서 제빵 기술과 기업가 정신을 배운 국희가 사사건건 그녀를 방해하는 송주태의 풍강제과를 넘어서 훌륭한 기업가가 되며, 주태는 결국 악행의 대가를 치른다는 그런 스토리. 여기에 국희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경무대 경제비서관 최민권(손창민)과 국희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사채업자 김상훈(정웅인)의 국희를 향한 사랑과 민권을 향한 국희 친구 신영의 사랑도 곁들여진다.


타고난 영특함과 싹싹한 눈치, 재바른 몸놀림까지, 국희는 어릴 적부터 ‘뭘 하더라도 이룰 아이’로 싹수가 보였는데, 태화당 주인 장태화를 만나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올바른 경영의 원칙 등 높은 수준의 기업가 정신을 배우며 한층 성장한다. 장태화에게 배우는 원칙과 신념은 따지고 보면 단순하다. 사람이 먹는 음식에 장난치지 않고 정직하게 만들 것, 음식이든 고객이든 정성을 다할 것. 하지만 돈과 욕심이 깃들면 그 단순함을 지키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순풍산부인과>의 박영규만 기억한다면 <국희>의 박영규는 놀라울 것.


국희와 대립하는 풍강제과 송주태 사장을 보라. 국수공장을 운영할 적에는 표백제로 양잿물을 쓰고, 국희가 개발한 식용 글리세린을 바른 빵 기술을 냉큼 가로채 특허 출원을 받는가 하면, 도매상들에게 박리다매 가격으로 제품을 푸는 건 물론 금반지까지 얹어주며 국희가 만든 ‘동그라미’를 외면하게 만든다.

심지어 ‘동그라미’에서 구더기가 나왔다는 허위 제보를 만들어 아예 시장에서 축출하고자 한다.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이중장부를 이용한 탈세 정도는 우스울 정도. <국희>의 시대배경인 1950년대 후반이나 지금이나 양심불량의 경영인들은 샴쌍둥이처럼 닮은 행적을 이어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국희 같은 올곧은 경영인이 적기 때문에 그런 정직한 경영인들을 드라마에서라도 보고 싶은 걸 테다.


빤하긴 하지만 일정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담보하는 권선징악 스토리에, 1950년대 후반이라는 폐허의 땅을 딛고 꾸준한 노력과 아이디어로 성공하는 여성 기업인의 성장담을 담아낸 <국희>는 최고 시청률 53.1%를 기록할 만큼 큰 인기를 모았다. IMF 외환위기 여파를 온몸으로 겪어내던 1999년의 대한민국에서 <국희>와 같은 성공 스토리는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시대극에서 특히 장기를 발하는 정성희 작가의 쫄깃쫄깃한 대본과 배우들의 찰진 연기가 보태졌다. 특히 아역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린 국희를 연기했던 박지미(이후 <천국의 계단>에서 김태희의 아역을 맡았다. 현재 활동명은 박가령)는 당차고 씩씩하면서도 오버하지 않는 연기로 성인 연기자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순풍산부인과>에서 “장인어른, 왜 이러세요”를 외치며 궁색하고 쪼잔한 연기를 선보였던 박영규가 반성할 줄 모르는 송주태를 맡아 펼친 악역 연기도 일품이었다. 주연인 김혜수야 뭐, 두말하면 입 아프고.



정석대로 차근차근 앞을 향해가는 국희. 이런 사업가, 쉽지 않다.


여성 기업가의 성장담을 담아내기에 러브라인은 다소 약하게 그려진 편이었는데, 그 편이 드라마의 성공에는 더 도움이 된 듯하다. 국희는 어려움을 겪어도 결코 손쉽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결국 국희와 이어지는 최민권 또한 그녀가 어려울 때 옆에 있어줄지언정 쉬운 도움은 던지지 않는다. 지금 다시 볼 때는 너무 올바르기만 한 최민권보다 물심양면 뒤에서 국희를 돕는 냉혹한 사채업자 김상훈에게 더 마음이 가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올곧이 성공하려는 국희이기에 상훈과는 이어지지 않았던 거겠지.


그나저나 <국희>를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국희 땅콩샌드’가 먹고 싶어지네. 찾아보니 ‘국희 땅콩샌드’ 외에도 자매품으로 드라마에서 풍강제과가 만들었던 초코샌드인 ‘국희 쵸코샌드’가 있고, 최근에는 편의점을 중심으로 ‘국희 동생 숙희샌드’라는 녹차크림샌드도 나왔단다. 그래도 역시, 과자는 옛것이 좋다.




*이 글은 2019년 9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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