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커플(MBC, 2006)
작품마다 전성기를 갱신하는 배우도 더러 있지만 ‘배우 누구’ 했을 때 ‘아, 그 작품에 나왔던!’이라고 바로 튀어나올 정도면 그래도 성공한 배우 인생일 것이다. 한예슬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환상의 커플>이 생각나는 것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외모로 유명한 한예슬은 <환상의 커플>에서 조안나와 기억상실증의 나상실 역을 맡아 유쾌, 상쾌, 통쾌한 웃음을 선사했다(이제는 유튜버로 유명하지). 2006년 드라마 방영 당시 그녀의 명대사 “꼬라지하고는~”을 따라하지 않은 이들이 드물 정도로.
<환상의 커플>은 ‘홍자매’로 불리는 홍정은, 미란 자매 작가의 작품(또 다른 홍자매로 <베토벤 바이러스>를 집필한 홍진아, 자람 자매도 있다). 홍자매는 <환상의 커플> 전후로도 <쾌걸 춘향> <마이걸>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최고의 사랑> <주군의 태양> 등 다수의 히트작을 써냈는데, 최근작인 <호텔 델루나>까지 주로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에 강점을 보였다. 초기작에 해당하는 <환상의 커플>도 사랑을 믿지 않던 상속녀가 기억상실에 걸리며 얽히게 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틱 코미디. 그런데 이 로맨틱 코미디는 달다구리한 사랑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엄청난 재산을 상속한 조안나(한예슬)는 그 어마어마한 부(富)로 인해 인간관계에 많은 상처를 받아 마음을 닫고 사는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다. 남편 빌리 박(김성민)에게조차 한없이 차가운 그녀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남해 리조트에 찾아왔다가 소규모 건설업체 사장인 장철수(오지호)와 얽히고설킨다. 여느 로맨틱 코미디처럼 우연과 오해가 섞여 앙숙처럼 되어 버린 두 사람. 문제는 남편에게 이혼 선언을 듣고 술에 취해 요트를 타다 안나가 실족한다는 것. 모두가 안나가 죽었으리라 생각한 사이, 병원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안나를 철수가 발견한다.
안나로 인해 금전적, 육체적 손해를 당한 철수가 안나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속인 채 한 달간 자신의 집에서 부려먹을 생각으로(네, 명실상부 범죄) 데려간 것이 문제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가족을 찾아주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안나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남편 빌리가 안나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녀의 흔적을 지우는 데 있다. 그렇게 상속녀 조안나는 철수가 이름 붙여준 나상실(인격상실, 어이상실, 개념상실에 기억까지 상실했다는 의미)이 되어 철수와 세 조카들이 사는 집에서 새로운 삶을 맞는다. 각기 매력이 있는 성인남녀가 한 집에서 사는데, 드라마상에서 스파크가 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겠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까칠을 넘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조안나가 나상실이 되어 철수와 어린 조카들과 함께하며 ‘츤데레’(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캐릭터가 되는 건 개연성이 있다. 조안나는 돈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겪어 마음을 닫고 안하무인 성격이 되었지만, 돈도 배경도 기억도 없는 나상실은 안나의 본래 성격이 발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 그래서 본래도 상황에 대한 명확한 판단과 나름 인생의 철학이 있었던 안나는 나상실이 되어 상황마다 주옥 같은 명대사를 날리곤 했다.
예를 들어 상실과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가다 철수의 옛 연인인 오유경(박한별)이 피자를 사주겠다고 하자 배신하고 돌아섰던 철수의 조카 삼인방에게 날리는 말이 그렇다. 유경의 갑작스러운 변심으로 피자를 못 얻어먹고 돌아온 조카들은 짜장면을 먹는 상실에게 짜장면을 사 달라 조른다. 이때 상실의 답변이 압권이다.
“잘 들어. 니들은 이미 짜장면을 포기했어. 지나간 짜장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어린이들, 인생은 그런 거야.” 기회비용이란 개념을 이토록 명확하고 직관적으로 표현한 대사가 있었던가!
숫자를 100까지 세지 못하는 막내 조카를 위해 100개의 초코볼을 준비해 숫자를 틀릴 때마다 초코볼을 우적우적 먹으며 “40까지 세기 위해 뺏긴 60개의 초코볼을 기억해”를 날렸던 공부의 필요성을 드높인 명대사도, 은근슬쩍 상실을 견제하는 뉘앙스의 안부를 철수에게 전해달라는 유경에게 “그런 냄새나 피우는 분명하지 않는 인사는 남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라고 받아치던 명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조연진의 활약도 빛났다. 아내 안나가 무서워 그녀를 외면하지만 항시 전전긍긍하다 안나에 대한 사랑을 깨닫지만 결국 그녀를 놓친 찌질한 남편 빌리 박, 빌리 박을 돕기 위해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지만 결국 모두 헛다리를 짚었던 공 실장(김광규), 공 실장과 함께 각종 드라마 패러디를 불사하며 커플의 연을 맺었던 덕구 엄마(이미영), 파혼 당하고 옛 연인 철수를 잡고자 애를 쓰는 청순가련형 여우인 ‘꽃다발’ 오유경 등.
하지만 이 드라마의 발견이라 할 만큼 빛났던 조연은 단연 ‘꽃단 미친년’ 강자(정수영)다. 기억을 잃은 나상실의 친구가 되어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주는 이 해맑은 정신의 소유자는 눈 오는 날에는 짝사랑하는 덕구 오빠(김정욱)를 만날 수 있다며 항상 눈 오기를 기다리곤 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던지. 기억을 되찾은 안나가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자신이 없다며 떠나려 하자 “언니, 지금 ‘얼음’이야? 그럼 내가 ‘땡’ 해줄게. 이제 가, 언니. 우리 눈이 오면 만나”라고 말할 때는 주책맞게 콧날이 시큰했다니까.
안나가 상실이 되어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 건 철수 외에도 철수의 조카들, 덕구네 가족과 남해마을 사람들, 강자 같은 따스한 이웃 덕분이었다. <환상의 커플>은 달다구리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사람 간 마음을 나누는 법을 조명했고, 그 결과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동시에 한예슬의 ‘인생작’이 되었다. 가끔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고민할 때면 나상실의 대사를 생각한다. 지나간 짜장면은 돌아오지 않으니, 오늘도 과감히 짜장면으로!
*이 글은 2019년 9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일요일이니 짜파게티라도 끓여 먹고 싶은데 사러 나가긴 귀찮으니 짜장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