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건 거의 시대극 같다. 멜로도 아니고, 힐링도 아니고… 그냥 ‘고정극’.
남편은 가끔 토로한다.
“나보다 돈도 더 잘 버는데, 용돈을 드려도, 치료비를 보내드려도 시어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셔.”
반면, 친정어머니는 사돈 앞에서 늘 조심스러운 눈치다.
“이런 건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라며, 한껏 미안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신다.
두 어머니를 보고 있자면 이쪽도, 저쪽도… 괜히 내 속이 상한다. 옛 사고방식 그대로 반응하시는 분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다가, 어느 순간 입을 다물게 된다.
하지만 더 억울한 건—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2024년형 심리로, 감정노동하며 통역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기울어진 전통은 여전히 집 안 구석구석 남아 있다. 며느리는 공손해야 하고, 사위는 융숭히 대접받아야 한다는 공식.
공식이란 말조차 미안할 만큼, 이건 사회적 함정에 가깝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반대로 하면 좀 나을까? 사돈 앞에서 며느리한테 쩔쩔매고, 사위 앞에서는 당당하고 느긋하게 행동해보는 것.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지만, 사실 이 상상이 그리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슬프다.
"그런 건 다 복이 되어 돌아온다"
며 조용히 끼어들던 한 중년 여성의 말은 순간 나를 멈추게 했다. 지긋한 연세의, 어쩌면 그 기울어진 질서를 평생 견뎌오신 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단박에 반응이 올라왔다. ‘이건… 정서적 가스라이팅 아닌가요?’ 복을 위해 참으라고?
미래의 평온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라고? 그렇다면 묻고 싶다.
“아픈 다음에 복을 받으면, 그걸로 뭐 하죠?”
그래서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장차의 복보다 중요한 건 지금의 내 속 시원함이다. 왜냐고?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고, 속 억울함을 삼키며 살아가는 건 결국 삶 전체를 병들게 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마음앨범에 남길까 말까 망설였다. 공감이라기보다, 그냥 속상한 푸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다시 읽어보니, 이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나누고 싶은 정서적 생존 보고서다. 누군가는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긴다. 이건 우리 세대가 끊어야 할 대물림이고, 그 일은 바로, 말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