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염색 좀 해줄래?”
남편의 부탁이었다. 막 앉아 이제 막 내 할 일을 시작한 참이라 몸을 일으키기 싫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마음을 들켰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은, 그 순간만큼은 나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욕실 한켠, 지난번 쓰다 남은 염색약을 조심스레 섞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작은 돌봄의 시간을 시작했다. 염색이라는 건 사실 별것 아니다. 그저 바르면 되는 일이지만, 얼굴에 묻지 않게 조심하고, 고르게 펴 바르고, 한 가닥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다 보면 그 사람을 얼마나 소중히 대하고 있는지가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나게 된다.
“여기 구레나룻은 좀 밀면 어때?”
나는 덧붙였다. 그러자 남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거 없으면 내가 아니지.”
우리는 함께 웃었다. 어디서 그런 고집이 나오는 걸까 싶으면서도, 누구나 사소하지만 놓을 수 없는 자기다움이 있다는 걸 다시금 배운다.
염색약을 아낌없이 덧발라 정수리까지 꼼꼼히 채우고
“15분만 기다려.”
자신 있게 말했지만, 포장지엔 ‘3분 후 샴푸’라고 적혀 있었다. 민망했지만 웃으며 넘겼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한결 또렷해진 머리칼을 보고,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듦을 애써 감추려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조금씩 손 봐주는 사이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예전엔 남의 부부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봤다. 이제는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 거창한 도움은 아니더라도, 염색 하나, 말 한마디, 따뜻한 손길 하나로 우리는 서로의 하루에 조금씩 색을 입히고 있다. 정서적 통장을 쌓는 일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지금, 주방에서는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가 난다. 염색을 마친 뒤, 남편이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한 것이다. 우린 말하지 않아도 안다. 돌봄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는 걸. 주는 만큼 받는 게 아니라, 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쪽으로 관계는 깊어진다는 걸.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가장 일상적인 일이 결국 가장 철학적인 일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결국 서로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이고, 사랑이란, 그 반복 위에 만들어지는 이름이 아닐까.
다음엔 강아지용 미용 가위로라도 머리를 다듬어볼까 농담을 해봤다. 아마 또 웃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 또한 우리 사이의 언어다. 염색과 설거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나와 너를 잇는 마음의 줄기’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것을 조용히 내 마음의 가치관에 한 줄 추가해본다.
“살아간다는 건, 서로의 작은 부탁에 응답하는 일이다.”